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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2017.2~)/여행기

04. 함께 떠난 장가계

장가계로 가다


막 우한에 도착했을 당시의 급선무는 현지인 친구를 사귀는 것이었다. 교환학생이던 본과생이던(주로 대외한어과로, 학위가 주어지지만 역시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다) 한국인 대부분은 어학당 개념의 국제학원에서 중국어 과목을 듣는데, 학생 분포가 이름 그대로 국제적인 구성을 갖추고 있기는 하지만(한국인이 40%) 아무래도 우한대학교 학생과의 접점은 적은 편이다. 


아무래도 친구를 사귀기 위한 좋은 방법은 동아리를 드는 것이리라 생각했다. 우한대학교 학생들도 동아리 활동을 하는 데, 매학기마다 회원 모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새 학년이 시작하는 9월에 모집활동이 이루어져 그 덕을 보지는 못했다. 결국 어렵게 사귄 친구들에게 물어물어 여행동아리를 발견하게 되었고, 나와 한국인 2명을 포함한 43명의 학생들이 지난 청명절 연휴 (3.29-4.02)동안 3박 4일에 걸친 장가계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서울에서 부산 정도 될까?


그리고 드디어 당일! 전날 교통사고가 나서 손가락에 골절상을 입었지만 그렇다고 연휴동안 학교에서 뒹굴거릴 수는 없었다. 점심시간 즈음에 학교 서문에 집결한 무리는 버스에 올랐다. 우한에서 장가계까지의 주행거리는 대략 600km,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이지만 무려 9-10시간이 걸렸다. 중국어로는 정말 难受(nan'shou, 받아들이기 힘들다)한 상황. 떠들다 지치면 자고, 다시 떠들고 하다보니 어느덧 해가 지고 저녁 11시 경이 되어서야 장가계에 도착했다. 첫날은 그렇게 가버렸다.


천자산


천자산을 오르는 산길 초입


다음날은 무려 아침 6시에 기상, 7시에 출발해 등산을 하기 시작했다. 등산은 등산인데 산길을 걷지는 않는다. 등산로가 시멘트로 발라져 있고 경사는 모두 계단이다. 이날 하루 도대체 몇개의 계단을 올랐을지 상상도 안간다. 


천자산을 오르는 도중에


아무래도 인원이 있어서인지 무리가 쉬는 빈도가 너무 잦아 결국 한 친구와 함께 둘이서 먼저 산을 오르게 되었다. 계단이 끝이 없어 고되긴 하지만 등산의 난이도가 아주 높은 코스는 아니다. 풍경을 즐기며 쉬엄쉬엄 걷다보니 어느덧 정상, 산 반대편에 잠시 넘어가서 사진도 찍고 화장실도 갔다오며 일행을 기다렸다. 풍경을 보며 마시는 맥주 한캔이 아주 꿀맛이었다. 그 자리에서 무려 한 시간 가까이를 기다려야했지만..


천자산정상에서

우리의 포토그래퍼 친구가 찍은 사진


원가계


정상에서 집결한 일행들은 각자 식사를 해결한 뒤 버스를 타고 원가계로 향했다. 식사를 하는 과정에서 나와 함께간 두명이 강권(?)에 의해 취두부를 먹는 일이 있었는데, 속이 한참 불편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취두부를 파는 매점이 눈에 보이면 일부러 일행들과 살짝 떨어졌다. 다행이 여행기간 동안 내장을 지켜낼 수 있었다. 한국인들은 주로 샹차이, 라지아오(辣椒), 화지아오(花椒)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나는 다 괜찮아서 못먹는 음식이 있느냐는 질문에 줄곧 취두부만 빼고는 다 잘먹는다고 대답하고는 한다. 그러면 대개의 중국인들은 이상하리만치 즐거워한다. 왤까


지하철 내부를 연상케 하는 풍경


원가계에서는 일행들과 보조를 맞추는 게 더 힘들어졌다. 청명절은 본래 조상들을 기리는 명절인데, 불효한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을 줄이야! 연휴기간에 장가계 같은 유명한 곳에가면 피할 수 없는 풍경이기도 하다. 풍경을 즐기는 것보다는 발 한발짝 떼기 힘든 이곳에서 빨리 벗어나는 것이 목표가 되어버렸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다리

돌기둥이 늘어선 것이 장엄하다


포토그래퍼


사드 문제 때문인지 예상보다는 적었지만 역시 한국인들도 많이 보였다. 출발하는 버스에서 우리의 领队(ling'dui, 대장님이랄까?)가 한국의 무슨 지도자가 '죽기 전에는 장가계를 봐야한다'라고 말해서 특히 한국인이 많다는 데 그 과장스러운 말을 한 지도자가 누군지는 모르겠다. 장가계 주변은 그래서 한국어 설명도 많고(한국인이 쓴 건 아닌 것 같다), 가게 메뉴도 한글로 씌여져 있는 곳이 많으며(역시 발번역이다) 심지어 한국 화폐를 받아주기도 한다. 호객행위를 하는 상인들의 어설픈 한국어도 재미있다.


저 위에 보이는 철골 구조물이 바로 그 비싼 엘레베이터다.


원가계를 지나와서는 엘레베이터를 타고 내려왔는데, 이 엘레베이터를 한번 타는 가격이 무려 72원이었다. 한국돈으로 만이삼천원 정도. 중국 대부분의 관광지에서는 학생증이 있다면 반값에 표를 주는 데, 유독 장가계에서는 거기다가 만 24세 미만일 것이라는 조건을 붙혀버려 나를 포함한 몇몇 늙은이들은 저 돈을 다 내고 말았다. 순식간에 내려오는 엘레베이터를 비싼 돈 주고 탄 것에 마음이 아파 일행에게 '1초에 1원이네'하고 말했더니 그 말을 엿들은 중국인 아재가 '1초에 2원'이라고 자기 일행들에게 크게 떠들며 나의 개그(?)를 뺏어버렸다. 그래도 1분은 탔다 이 사람아


숙소로 돌아가며


숙소로 돌아가면서는 다 같이 식사를 했다. 수많은 중국인들과 함께 앉아 식사를 하는 경험이 처음이다보니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 식사를 하고, 숙소로 돌아올 때 쯤 여행 둘째날의 해는 저물어가고 있었다. 


서부가(西部街)



시부지에 입구


그러나 나는 잘 수 있을 정도로 피곤하지 않았다. 숙소에서 포켓볼, 랑인(狼人, 마피아게임) 등을 하며 놀거나 일찍이 잠든 일행들을 뒤로하고 같이 온 한국인 형과 시내를 구경하자며 나왔다. 운좋게도 서부가로 가는 일행을 만나 이 동네에 서부가라는 곳이 있는 줄도 몰랐던 우리는 그곳으로 함께 향하게 되었다. 그저 관광단지인데 왜 그렇게 신났는지 모르겠다. 현란한 불빛들을 보자 괜히 마음이 들떴다. 서부가에는 관광객을 유혹하는 볼거리 들이 많았다.


떡을 찧는 것이 아니라 설탕 과자를 만드는 것이다.

흑차(黑茶)가 이곳 특산물이라고 한다


무료로 시식, 시음하는 곳이 많았는데, 찻집도 역시 그랬다. 일전에 아르바이트를 하던 당시 중문학을 전공하신 팀장님이 휴게실에서 손수 보이차를 끓여 주신 적이 있었는데, 당시 그 모습이 왜 그렇게 멋있어 보였는 지 모르겠다. 중국에 와서 꼭 중국 요리를 하는 방법과 차예(茶艺, 다도는 일본의 용어고 중국에서는 차이라고 한다더라)를 배워가고 싶었다. 학교 주변에 마땅한 요리 학원이 없어 요리의 경우 떠나기 전에 내가 자주 찾는 볶음밥집 아저씨한테 볶음밥이나 배워서 떠날 요량이지만 차는 꼭 제대로 배워가고 싶다. 당장은 마땅한 도구가 없다보니 차를 사지는 못했다.


시식, 시음은 尝一尝(chang'yi'chang) 또는 试一试(shi'yi'shi)라고한다.


술이 어찌 빠지랴. 중국은 차와 음식만큼 술도 다양한 나라다. 특히 몇몇 술은 맛이 아주 좋아서 함께간 형과 동시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날은 백주를 마시지말라는 검지손가락의 눈물겨운 호소에 마지못해 발길을 돌렸지만, 결국 다음날 그 형과 같이가서 두 병이나 사버리고 말았다. 손가락에 끼운 깁스 같은 것을 (이 놈의 병원에서는 깁스도 아니고 철편으로 대충 고정시켜놨다.) 벗어버리는 날 축하주로 들것이다.



이 날 서부가 구경은 만회(晚会,wan'hui)로 끝을 맺었다. 불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뛰노는 데 아쉽게도 우리가 도착한 이후 금방 끝나버렸다. 함께 서부가로 간 일행은 5명의 여자아이들이었는데 만회가 한창인 것을 보고 급하게 뛰어들어가는 귀여운 모습이 인상 깊었다. 옆에 있던 형은 중국인들이 전반적으로 어쩌면 순수한 것 같다는 말을 했다. 우리나라였다면 유치하다며, 또는 창피하다며 외면 받았을 놀이일 수도 있을테니 말이다. 사진과 동영상을 찍다가 만회가 끝나버려 참가하지는 못했으나 보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었다. 서부가 제일 안쪽에서 매일 저녁 9시 30분 경 한다고 하니 장가계를 방문하는 사람은 다녀와도 괜찮을 것 같다.


숙소로 돌아와서는 다른 일행들과 함께 근처의 꼬치구이집으로 나왔다. 맥주를 한잔하면서 간단하게 설명가능한 한국 술게임들을 가르쳐줘서 놀았다. 베스킨라빈스, 눈치게임 같은..



십리화랑&금편계곡


전날 술자리를 함께한 대장님이 기상시간을 늦춰주신 덕분에 셋째 날은 7시까지 잘 수 있었다. 간단히 아침을 해결한(3일 내내 숙소 앞에서 파는 우육면만 먹었다) 뒤 일행은 금편계곡으로 향했다. 여행기간 내내 천자산을 제외하고서는 모두 평지여서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다만 이 날부터는 비가 조금씩 내렸는 데, 우한도 그렇고 비가 쏟아지는 느낌이 아니라 아주 조금씩 내리는 정도라 관람하는 데 큰 불편은 없었다.


십리화랑 입구즈음에서


십리길이 화폭처럼 아름답다해서 십리화랑이다. 걸으며 보는 풍경이 과연 아름다웠다. 돈을 조금 내면 레일차를 타고 여유롭게 관람할 수 있다는 데, 나는 그냥 걸었다. 사람이 많은 좁은 길이라 고통스럽기는 했다. 십리화랑을 구경하고 나서 일행은 금편계곡으로 버스를 타고 향했다.


입구에서 맞아준 원숭이, 장가계에도 많지만 중국 전반에 많은 듯하다. 우한의 몇몇 공원에도 있다고 한다.

한참 돌수제비를 던지며 놀았다. 오른 손을 못쓰니 한번도 성공을 못했다


산천이 즐비한 한국에서야 특별할게 없는 풍경이지만, 중국에서 계곡을 볼 기회가 그렇게 많지는 않나보다. 중국은 대신 호수가 많다. 이 곳은 계곡을 따라 2시간 정도 걷는 코스이다. 풍경은 역시 아름답다. 여행기간 내내, 아무래도 일행 중 외국인이 우리 셋 뿐이다보니 많은 질문들을 받았다. 특히 짤막한 한국어를 가르쳐달라는 말도 많았다. 생각보다 한국에 대한 관심이 다들 많고, 오히려 드라마나 가수들에 대해서는 나보다 잘아는 친구들이 많았다.


끝자락에서 마주친 정자. 여기서도 30분을 기다렸다


외국인이 우리 뿐이라는 말이 사실 어폐가 있을수도 있는 게, 대만에서 온 친구들도 많았다. 대만친구들의 경우 학교 행정 전반에 있어 자국민 취급을 한다. 예를 들자면 외국인 학생의 경우 중국학생들과 기숙사를 같이 쓸 수 없어 외국인 기숙사에 거주하는 반면 대만에서 온 교환학생들은 중국학생들과 기숙사를 함께 쓴다. 중국에서 대만으로 가기 위해서는 비자가 필요한 반면, 대만인은 비자 없이 중국에 자유롭게 들어올 수 있다고도 한다.


반면 중국 공민 신분증은 없고(대신 다른 신분증을 대륙 중국에서 지급해준다더라), 공항에서도 국제선(정확히 말하자면 완전히 외국취급은 아니고 국제선 밑에 대만, 마카오, 홍콩행으로 병기되어있다)으로 분류된다. 대만과 중국 사이의 양안관계는 여러모로 미묘하다. 이는 마카오, 홍콩에서 온 학생들도 마찬가지인데,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이 불가능한 현실에 체념하는 느낌도 없지 않아보였다.


외국인이다보니 이에 관련한 질문도 많이 받았다. 시사상식에 무관심할 거라고 예상되던 아이들도 대만, 홍콩, 마카오가 중국과 별개의 나라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던진다. 모두가 만족스럽게 대답할 방도가 없다. 내 비자로는 그 지역들을 방문했다가 바로 중국에 재입국할 수는 없다고 돌려서 대답할 뿐이었다.



장가계국가산림공원


일행 중에는 조선족 학생도 있었다. 중국인 신분증에는 소유자의 민족이 기재되어 있다. 이 학생의 경우 부친은 한족, 모친이 조선족인 경우였는데 이런 경우 스스로 자신의 민족을 선택할 수 있다고 한다. 그 학생의 경우 조선족을 선택한 것으로 보이지만, 한국어 또는 조선어는 하지 못했다. 스스로 조선족이라고 소개한 것을 듣고 '안녕하세요'하고 인사했다가 민망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한국인이 반가워서 인지 한국 동요, 아리랑 같은 노래를 불렀으나 가사는 모두 중국어로 바꾸어 불렀다. 


이 어린 여자아이는 여행기간 내내 함께간 친구 하나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며 수 많은 질문을 던졌는 데, 자신의 한국어가 외국인이랑 크게 다르지는 않다는 대답을 듣고서는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정체성 문제로 괴롭고 고독하다는 게 요지였다. 그 내용을 듣고나서는 나도 애매해졌다. 한국어를 하지 못하는 조선족, 국적을 떠나 민족적인 관점에서 이 아이가 겪는 정체성 문제에 마음이 아팠다.


동양화를 그리고 있다


소수민족은 중국 사회에서 많은 특권과 우혜를 누린다고 들었는데, 예를 들자면 이전부터 산아제한으로부터 자유로웠다(작년에 민족을 막론하고 산아제한이 철폐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한족으로 동화시키는 원심력 또한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장가계에도 있는 토가족(土家,tu'jia)은 호북성, 호남성에 널리 분포하고 있는 소수민족으로, 우한대학교 학생 중에서도 많이 만나볼 수 있었다. 


위의 아저씨들이 그리는 그림에 깊은 관심을 보인 나의 마니또(여기서는 수호천사라고 하더라) 역시 토가족인데, 토가족 전통 복장을 대여하는 것을 보고 너도 입고 싶냐고 물어봤다가 집에 있다길래 알았을 정도로 한족과의 차별성이 없다. 토가족의 경우 지역별로 세분화되어 통일성이 없지만 고유의 문자까지 있는, 상대적으로 정체성이 강한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현재는 언어와 문자가 거의 실전된 상태이다. 이는 다른 대부분의 소수민족들도 마찬가지이다. 교육, 생활 수준이 상대적으로 높아 중국 정부가 우려할 정도로 민족적 정체성이 강하다는 조선족, 그 조선족 소녀 역시 조선어를 하지 못하니 말이다.


마지막 저녁


나름 라이브 술집


오후 4시쯤 일찍이 숙소로 돌아온 일행은 잠깐의 휴식을 취한 뒤 다 같이 서부가로 나왔다. 저녁 식사를 하고, 주점에 들어갔다. 이전 글에 서술했다시피 중국에서는 음주문화가 그렇게 발달해있지는 않아 가볍게 맥주를 마시는 정도였다. 그렇지만 술게임에 있어서는 다들 아주 진지하더라. 


 

중국 술집에 가면 상 위에 주사위랑 컵이 놓여져 있는데, 그걸로 여러 주사위 중에 무슨 숫자가 몇개 있을까를 맞추는 놀이, 아니면 삼육구와 닮은 7의 배수 놀이 등 굉장히 단조로운 게임들이었다. 이러니 눈치게임만 가르쳐줘도 난리가 난다.



숙소로 돌아와서는 마피아 게임이랑 닮은 랑인이라는 게임을 했다. 여기서 쓸데없는(?) 진지함의 끝장을 봤다. 다들 두뇌풀가동한 코난이 되어버린다. 언어적인 장벽 때문에 제대로 하기 힘들었는데, 그래서인지 두 판해서 다 졌다. 마지막 저녁은 이렇게 저물어갔다.


황룡동굴



황룡동굴 입구로 가는 정원, 역시 포토그래퍼다


마지막 날 아침은 황룡 동굴을 구경했다. 만 24살인 나는 할인혜택을 못받을 거라 생각하고 학생증을 안가지고 나갔다가 검표하는 곳에서 봉변을 당했다. 검사원이 까다롭게 굴어 십분간 실랑이를 벌이다가 드디어 내가 우한대학교 포털을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교환학생의 한량한 시간표를 목도해보린 우리의 대장은 충격에 빠져버렸다.



동굴 자체는 굉장히 거대했다. 동굴 안에서 배를 타고 다닐 정도니 말 다했다. 아직 완전히 탐사되지도 않았다고 한다. 산 안쪽이 텅빈 느낌일 정도로 천장이 높았다. 다만 굉장히 덥고, 습하고 뭐라 형용하기 힘든 불쾌한 냄새가 났다. 때문에 결국 가이드를 제치고 빠르게 출구를 향해 나아가 버렸다. 길이 난해하기 때문에 추천은 하지 않는다.



여행을 마치고


동굴에서 나온 일행은 이제 우한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올랐다. 다시 긴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막히는 고속도로 위에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우리는 결국 우한대학교에 무사히 도착했고, 여기저기 흩어진 각자의 기숙사로 들어간 뒤 다시 여기저기 흩어진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3박 4일간의 시간 동안 굉장히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골절상을 당한 바로 다음날 출발한 여행이라 거동이 불편한 점이 있었지만, 그 이유로 가지 않았다면 크게 후회했으리라. 중국인들과 교류한 경험 중에서 가장 손꼽을 만한 기억이 아닐까 싶다. 중국인 친구들이 당장 이 글을 읽지는 못하겠지만, 내가 아주 심심한 어느 날 이 글이 번역되는 일이 있다면 함께 추억을 되새길 수 있으리라.


5월 1일 노동절 연휴 기간에도 낙양으로 떠나는 여행이 예정되어 있다는 데... 장가계보다 훨씬 먼 그곳으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을까 싶어 고민 중이다.


마지막 날 아침, 숙소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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