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며
매우 오랜만에 글을 쓴다. 우한대학교에서의 교환학생 기간을 마치고나서 나는 한달간의 여행을 다닌 후 한국으로 돌아왔다. 긴 여행이었다. 일주일 남짓이 지나 이제 짐을 풀고 일상으로 돌아오고 있는데, 마치 중국에서의 반년이 없어진 마냥, 모든게 너무 자연스럽다. 이대로 그 시간을 잊어버리는 게 너무도 빠를 것 같더라. 그 시간을 정리하는 일이 조급해진 이유다.
여름 방학 기간 동안의 여행은 내가 중국에 교환학생을 가기로 한 가장 궁극적인 목적이었다. 우한대학교에서 여기저기 나돌아 다니기 전부터 나는 중국의 서변을 관통하는 여행을 꿈꾸고 있었다. 신장위구르부터 티베트를 거쳐 사천, 운남에 이르는 노선을 말이다. 그러나 그 꿈은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
티베트 여행을 떠나는 게 힘들더라. 아니 비싸다고 말하는 게 옳겠다. 외국인은 티베트 여행을 가기 위해서는 가이드를 고용해야하고, 허가증을 따로 받아야한다. 일전에 장가계를 같이 간 바로 그 동아리에도 문의를 해봤으나 티베트 노선에는 외국인 참여가 불가능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신장에 들어갔다가 티베트를 통과하지 않고 사천으로 나오는 육로는 너무도 멀었다. 결국 내 여행 노선은 상당히 축소될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대략 한달 간의 여행은, 서안에서 시작해 사천성을 거쳐 운남성으로 내려오는 여정을 거쳤다. 본래가 그다지 계획적이지 못한 사람이라 닿는 대로 천천히 내려갔다. 이야기가 대단할 것은 없어도 길 것이 분명해 첫 글을 쓰는 데 다짐을 크게 해야 했다. 시안을 시작으로 7-9 편의 글을 더 올리지 않을까 싶다. 마지막 글을 올리고 나서야나는 비로소 중국을 떠날수 있겠다.
한달반 전으로 돌아가, 나는 이제 막 시험을 마치고, 말 같지도 않은 행정처리 아래 떠나는 수속을 밟느라 지옥불 속 우한대학교 곳곳을 누벼야했다. 드디어 떠날 날이 오고, 하남성을 같이 갔던 멋있는 친구와 시안으로 향한다. 둘다 그다지 알아보고 출발하질 않아 마냥 시안가는 김에 화산도 같이가자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기차가 화산을 지니가더라. 갈길 바쁜 우리는 깔끔하게 화산을 포기하고 그대로 시안에 내렸다. 시작해본다.
시안의 종루
앞서 상해편에서 중국의 과거를 보려면 시안을 가야한다는 말을 소개한 바가 있었다. 시안 일대는 서주의 호경, 진나라의 함양, 한대로부터 위진남북조를 거쳐 수당시대까지 이어진 장안 등 다양한 수도들이 위치했던 중국 역사의 발흥지다. 역사 속에 관중이라 불리었던 지역으로, 관중이란 명칭은 험준한 산맥 사이사이에 위치한 다양한 관문들 사이에 위치한다는 뜻이다. 시안 일대는 드넓은 평야가 험준한 산맥에 둘러싸인 지형으로 전략적인 이점과 풍부한 생산력을 동시에 지닌 지역이었다.
시안 성벽 남문
중국의 상고사는 소위 하상주로 이야기되지만, 하나라의 경우 실존이 불분명하다. 갑골문으로 유명한 동쪽의 상나라를 멸망시킨 것이 그 상나라의 제후국이던 주나라의 무왕이다. 주나라의 시초가 되는 고공단보는 서쪽의 이민족을 정벌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채로 이 시안 일대에 책봉 되었었는데, 시간이 흘러 이민족과 결합한 주나라는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동쪽의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 세계의 새로운 맹주가 된다.
성벽은 비교적 현대에 재건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까지의 국가란 단순한 성읍 국가였기에 주나라는 맹주가 되고나서도 정복한 상나라 지역까지 지배할 강력한 실력이 없었다. 고로 정복지였던 상나라에 다시 그 후손을 제후로 책봉하고, 여타 성읍국가들과도 그들을 제후로 인정하고 그 스스로 상위의 '왕'이 되는 선에서 타협했다. 이를 봉건제도라고 한다. 이 봉건제의 확장성이란 어마어마해서, 각 제후국의 발전에 따라 주나라 왕권 휘하에 형식적이나마 복속된 지역이 급속도로 늘어나 화북, 관중, 중원지역을 모두 포괄하기에 이르었다. 주나라로서는 아주 성공적인 제도였던 셈이다.
성벽은 난징의 그것만큼 웅장하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상나라가 멸망한지 어느덧 400년 남짓이 흘렀을 때, 제후국들은 더 이상 주나라의 소집에 응하지 않았고, 중국 세계 서변에 치우쳤던 주나라는 견융이라는 이민족의 침입을 받아 동쪽으로 옮겨가게 된다. 이를 동주라고 하고, 이 때가 춘추시대의 기점이된다. 이때로부터 각 제후국들의 치열한 항쟁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이윽고 오백년 남짓이 지나 역사는 되풀이되어 서변 이민족들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진나라가 다시금 관중을 기반으로 일어나 동쪽의 제후국들을 합병하고 중국을 통일한다.
고루
당 태종 연간 세워진 대안탑
섬서성박물관, 사람이너무 많아 유물을 보기 힘들다.
그러나 당나라 300년 남짓을 거치고 관중지역은 기후변화로 인해 쇠퇴했고, 전란으로 인한 폐해는 다시 복구되지 않으면서 중국의 중심은 영원히 동남부로 이동하게 된다. 시안이 위치한 섬서성은 전통적인 중국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인구가 3천만을 웃돌 정도로 적은 편이다. 그러나 중국의 발원지답게 서북지역에 치우쳤음에도 한족인구가 99%를 상회한다. 차량번호판에 들어간 줄임말은 진(秦), 위엄있는 단어다.
병마용갱과 진시황릉
앞서 말한 역사의 영향인지 주나라의 수도였던 호경은 물론이고 진나라 수도였던 함양 역시 흔적을 넘어서서 위치조차 불분명하다. 때문에 낙양보다는 상황이 괜찮아도 시안 역시 볼거리가 많이 남아있는 곳은 아니다. 그러나 땅속에 묻혀 있어 전란과 황폐화를 피해갈 수 있었던 위대한 유물이 있으니, 중국하면 누구나 떠올릴 병마용이 바로 그 것이다.
병마용 입구
병마용까지는 시안기차역 근처에서 버스를 탄뒤 한시간 정도를 가야했다. 사진에 드러나다시피 날은 굉장히 더워 고생스러웠다. 박물관도 그랬지만 병마용 역시 사람이 미어터져 잠깐의 관람을 위해 장시간의 인내를 거쳐야했다.
이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땅속에 잠자고 있던 병마용은 1970년대 한 농부가 우연히 발견한 뒤 세상에 알려졌다. 이후 대대적인 발굴이 진행되었지만, 막발굴(?)의 결과 토용들 위에 칠해져있던 염료가 날라가버렸고 심지어 상당수의 토용들이 부서져서 굴러다니고 있다. 중국정부는 최근 발굴을 잠정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1호갱부터 3호갱이 있는데, 다양한 사진으로 익히 보셨을 이 갱이 가장크고, 여타 갱에는 남아있는 병마용이 많지 않아보였다.
토용들
사진을 보고 기대한만큼은 아니었지만 압도적인 규모와 웅장함을 지니고 있는 유물임은 부정할 수 없다. 상나라 시기만해도 순장이 굉장히 일반적이었는데, 갑골문의 기록된 순장의 규모와 잔혹성은 보는 이를 놀라게 한다. 그러나 이후 천년이 넘는 시간이 흐르며 순장문화는 점점 퇴화되었고, 그 자리는 이런 토용이 매꾸게 된 것으로 보인다. 토용도 점점 퇴화되어 한나라 시기의 왕릉에서 나오는 토용은 규모가 훨씬 작아진다.
장군이라한다.
춘추전국시기 진나라는 서쪽에 치우쳐저 여타 국가들로부터 이민족이라며 멸시를 받아왔다. 그러나 진나라는 거기에 주눅들기는 커녕 오히려 장점으로 발전시켜 서쪽 기마민족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서쪽으로부터 철기와 마차를 가장 먼저 도입한 것도 진나라였다. 이민족과의 융합에도 적극적이었는지 위의 장군상을 보면 현대 중국인들의 외양과는 다른 감이 없지 않다.
시황릉
병마용을 관람하고서 이동한 진시황릉은 그저 공원일 뿐, 볼것이 없었다. 무엇을 근거로 여기를 여산릉이라고 주장하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말이다. 진시황은 드넓은 지역에 각기의 문화를 갖고 존재해오던 다양한 국가를 중국이라는 하나의 이름 아래 통일함으로써 많은 부침을 겪고도 오늘날까지 계승된 이 거대제국의 시조가 된 인물이다. 차이나라는 이름 또한 진나라의 국명이 어원이다. 그 자신의 위업을 기념하고자 여산에 거대한 릉을 지었다고 사서에 남아있다. 이 공원 뒤편의 산이 인공적으로 쌓아올려졌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오싹해졌다. 정작 본인이 눕혀졌을 지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길을 걷는데 한무리의 중국인 여행객들을 거느린 가이드가 "광동인은 구이라오(鬼佬)라고 부르고, 일본인은 왜구라고 부른다. 한국인은 빵즈(棒子)라고 부르고.. 그럼 이 동네 사람은 뭐라 부를 것 같냐"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중국에서는 한국인들을 빵즈라고 부르는데, 어원이 명확하지는 않지만 청대부터 문헌에 등장한 멸칭이라고 한다. 조선에서 중국으로 사절단이 가면 지나는 마을마다 사절단을 대접해야했는데, 이 때 사절단이 하인으로 부리던 방자들이 하도 난폭하게 굴어서 고려방자라는 말이 멸칭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조선시대만해도 한국인을 고려인이라고 많이들 불렀다고 한다.
회족 거리와 청진사
회족거리 앞에 있는 고루
양꼬치엔 칭따오라는 말이 유행을 타니까 중국에서 정말 양고기를 많이 먹는다거나, 양꼬치가 한국의 그것보다 맛있고 싸다는 오해를 가질 법한데, 최소한 내가 거주하거나 여행한 중부 지방의 노상 샤오카오가 파는 고기는 그렇지 않았다. 싸기는 하지만 고기가 작고 특별히 맛있지도 않다. 맛 있는 고기를 먹자면 이슬람을 뜻하는 청진(清真)이라는 수식어나 신장이라는 지명이 붙은 가게로 가야했다.
회족거리, 그것도 목축지역에서 가까운 서북도시 시안의 회족거리에서 먹는 양고기는 정말 맛있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이슬람거리이다보니 술을 안팔아 양꼬치에 맥주 조합이 불가능하다는 것인데, 이 사람들도 영악해 회족거리 바로 바깥에 있는 가게에서는 술을 마셔도 된다. 회족거리에는 양꼬치 말고도 소고기나 양고기탕에 밀가루 반죽을 불려 먹는 파오모(泡馍), 빵 사이에 구운 고기를 다져넣은 지아모(夹馍), 내게는 별 맛 없던 마장량펀(麻酱凉粉) 등 소소한 먹거리가 많다.
청진사
회족거리 한켠에 위치한 모스크에도 가보았는데, 기대와는 달리 굉장히 중국적인 외양이었다. 중국의 혈통을 가지고 중국인들 사이에서 오랜 세월 존재해온 회족들의 삶의 모습이 이 모스크의 외양에 그대로 묻어나오는 듯 했다.
회족들은 긴 세월 탄압 받고, 배척 받기도 했다. 중국 정부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횟수도 적지 않다. 청말에 일으킨 둥간반란이 유명하고, 멀리 운남성에서는 이슬람국가가 세워지기도 했다.
안에서는 기도가 한창이었다
또 그런 역사의 한편에서는 중국인들과 오랜 세월 섞여 살면서 공존하기도 했다. 이들은 당나라 때부터 중국 역사 속에 존재하면서 한족과 동화되었고, 오랜 시간을 거쳐 이룩해낸 역사적 타협의 결과 종교에 호의적일 수 없는 사회주의 정부 아래서도 이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마치며
한 공원에서
3박 3일의 시안 여행은 끝나가고 이제 다음 행선지를 정해야 했다. 원래는 서북 방향으로 조금 더 올라가 반년간 수 없이 먹은 라면의 고향 란저우까지는 가보고 남하할 생각이었지만 그 곳에서 구채구로 들어가기가 매우 힘들다는 것을 알고는 포기했다. 시안을 함께한 친구는 서북 쪽으로 계속 올라가 카자흐스탄까지 가는 노선이었고, 나는 이제 남하해 운남성으로 내려가야 했다.
BiangBiang면
새벽 5시에 일어나 기차역으로 나온 우리는 이제 각자의 목적지로 헤어져야했다. 서로가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을 고생길을 앞두고 있었음을 알기에 마지막 인사가 꽤나 길었다. 전쟁터로 떠나는 마냥 살아서 한국에서 보자는 농을 건네고, 혼자가 되어 광원으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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