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의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말이 반년이지 4개월 조금 넘는 한 학기 동안 중국 각지를 여행하겠다는 목표 자체가 허황된 것이기도 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하는 데까지 발버둥은 쳐봐야지 않겠는가. 교환학생 중에 마음이 맞는 친구가 있었다. 막 6월이 되는 주말에 여행가자고 말 몇 마디 주고받은 당일, 먼저 출발해버린 그를 따라 다음날 나도 낙양으로 향해버린 것이다.
용문석굴
낙양에 내리자마자 숨이 턱 막힌다. 바야흐로 38도. 6월 초에 이런 날씨가 가능하단 말인가? 굉장히 건조해서 땀은 별로 나지 않았으나 피부는 타다 못해 따갑기까지 했다. 장안부터 낙양에 걸쳐진 고대 중국의 발원지가 쇠퇴하게 된 원인으로 많은 사람들이 자연적인 기후변화, 즉 사막화를 꼽는 데 이 햇볕이 그 근거가 될 수 있겠다.
용문석굴로 가는 버스에서
낙양용문역에서 내렸지만, 아직 용문석굴까지는 멀었다. 한참을 들어가고, 다시 입구에서 버스를 타고 들어갔다. 입장표를 파는 곳에서 약간의 실랑이가 있었는데, 내가 외국인인 것을 알고 학생할인을 거부한 것이 그 원인이 되었다. 여기서 얻은 한가지 팁은, 표를 살때 국적이 기재된 정식 학생증 대신 교원카드부터 제출하는 게 이롭다는 것이다.
용문석굴 입구
옆에 흐르는 강은 이수라고 불린다고 한다.
용문석굴은 윈강, 둔황 석굴과 함께, 불교를 중국에 받아들인 북위시대로부터 당초까지 지어진 거대 석굴조영이다. 5호 16국시대의 북조국가나 그를 이어받은 수, 당나라는 지배계층이 모두 선비족 등의 이민족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적극적인 한화정책을 채택하면서도 피지배층에 놓인 한족들의 반발에 대해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 맥락에서 중국 (화이사상을 포함한) 사상에 대한 대항마로서 불교를 내세웠다는 해석도 있다.
봉선사
1500여년 전 이곳에는 어떤 그림이 그려졌었을까
용문석굴 내에 현존하는 석불 중에 가장 큰 봉선사는 당시 불교문화의 관방적(?)인 성격을 잘 드러내기도 한다. '저기 뭐 큰 거 있다'하고 하염 없이 계단을 오르다가 발견, 입을 떡벌리고 와 하는 소리만 내뱉게 만드는 규모의 이 석불은 무측천 시대에 지어졌는데, 가운데 놓인 비로자나불상의 얼굴이 그녀를 본따 만들어졌다는 말이 있다. 좌우로 총 9개의 거대한 석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데, 형태가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은 우측의 것 밖에 없다.
머리가 온전한 것이 없다.
그 이유는 다들 잘 아시다시피 문화대혁명이다. 용문 석굴이 규모가 작은 것도 아닌데, 작은 불상들은 특히나 하나하나 찾아다 목을 베어놓았다. 다행히 상대적으로 커다란 불상들의 목은 온전한데, 석굴 전체의 붕괴를 우려해서 였을 수도 있고 그들 자신의 도구가 조악해서였을 수도 있다. 저 작은 불상 하나하나도 그들의 조상이 인고의 시간을 거쳐 조각해 낸 것일텐데. 안타깝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구멍 하나하나 비어있는 것이 없다
홍위병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목 없는 불상들만 덩그러니 남았지만, 석굴 자체의 규모는 정말이지 상상을 초월했다. 1500여년 전 여기 돌산에 와서 하루하루 불상을 깎던 당대인들의 종교적 각오, 그리고 그들의 생활을 뒷받침할 수 있던 당 시대의 부유함이 남겨진 유산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다. 심지어 이런 석굴이 두 개나 더 있다니.
석굴 전경
이수 반대편에도 볼거리가 있다.
강 건너편은 소개하지 않겠다. 내 낙양 여행은 사실 꽤 짧게 끝났는데, 낙양은 모두에게 유명한 고도임에도 불구하고 볼거리가 많이 남아있는 도시는 아니다. 낙양 박물관 정도가 가볼만하다는 평을 들었다.
숙소 근처의 야시장
용문석굴 구경을 마치고 숙소에 들어가자 이미 저녁이 되었다. 낙양 음식은 위 사진 속 간판에도 보이는 수석(水席)이 유명하다고 하는데, 검색결과 평이 그다지 좋지 않아 과감히 포기했다. 숙소 바로 옆에 야시장도 있었으나 밤 중에도 온도는 30도 이하로 내려갈 생각을 안하더라.
결국 에어컨이 켜져있는 데를 찾아들어가 친구와 훠궈를 먹었다. 이름은 기억 안나는 허난성의 무슨 술에 적당히 취할 무렵, 그 친구가 가방에서 지도를 꺼내면서 우리의 여행은 예상과는 현저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 버리게 되었다.
우주, 위저우(禹州)
지도를 펼쳐놓고 눈을 감은 채로 다음 목적지를 찍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나온 곳은 동백, 통바이(桐柏)라는, 호북성과 하남성의 경계에 위치한 작은 현이었다. 엄청난 거리를 보고 낭패감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우리는 서로 '가야지', '가자'하는 말을 건네며 잠들었다. 내일 알아서 얼버무려지기를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얼버무려지지 않았다. 결국 다음날 오전 힘들게 기차역을 찾아갔으나 통바이로 가는 차는 없었고, 버스터미널을 찾아갔으나 이번에는 통바이가 어딘지도 모른다. 중국 기차역이나 버스터미널 앞에는 그렇게 호객꾼이 많은데, 어디가냐는 말에 통바이로 간다하면 신장(위구르자치주)에 있는 데냐고 되묻더라. 내가 통바이 사람인 마냥 억울했다.
그래서 결국 버스터미널에서 지도를 다시 한번 더 찍었다. 눈을 떠본 순간, 손가락 끝이 가르키고 있던 곳은 위저우, 중국의 신화적인 군주인 우왕의 앞글자가 붙은 지역이다. 그렇게 처음으로 중국 고속버스에 앉아서는 듣도 보도 못한 지역으로 향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버스에서 내리고
버스가 위저우를 안들리고 그냥 남쪽으로 지나가려는 줄 알고 공장 인부들을 따라 허허벌판에 내려버렸다. 아저씨들은 공장으로가고, 버스는 다시 고개를 돌리더니 위저우 쪽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 길가엔 드문드문 환경 미화원들이 있었으나 택시고 버스고 그림자도 안보인다. 어쩌랴, 걷는 수밖에.
이런 건 처음이다
꽤나 걷고 나자 드디어 택시를 발견, 시내로 나올 수 있었다. 급선무는 우선 오늘 하루 묵을 수 있는 숙소를 구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위저우는 인구가 백만이 넘는 시급 단위이고, 관광객은 거의 없어도 가끔 출장오는 외국인들도 있는 지역이었다.
앱이름은 蜜蜂出行
ofo나 Mobike등 공용자전거를 앱을 통해 제공하는 서비스는 많이 보아왔지만 이 곳에서는 디엔동을 그렇게 서비스하고 있더라. 덕분에 편하게 타고다니면서 여러 곳에서 가격 비교도 하고, 택시비도 아낄 수 있었다.
烩面
결국 숙소도 구했는데, 시설에 비해 가격이 정말 착했다. 허남성은 사실 전통적인 중국 지역(명나라 당시의 영토랄까?) 중에서 빈곤한 성이라는데, 그 이유로 지역차별에 시달리기도 한다고 들었다. 그래서인지 택시 기본요금은 4원, 푸짐하게 나온 점심식사도 15원 남짓이었다. 여행자 입장에서는 굉장히 좋았다. 숙소는 비즈니스 호텔의 2인실로 120원 정도 줬던 것으로 기억한다.
颍河라는 강이 흐르는 데, 4대강도 한류가 있나보다
시골 마을의 골목길. 길은 포장을 안한 거나 별 차이가 없었다.
숙소를 잡고 나와서는 디엔동을 타고 도시 이곳 저곳을 둘러보았다. 이곳에 하나라 유적지가 있다길래 그곳을 목적지로 찍고 가는 데 위의 사진을 찍은 데에서 더 나아가자 범위를 벗어났다며 디엔동이 꺼져버렸다. 당황스럽기가 그지 없었는데, 현지인들도 다가와서 이거 어떻게 타는 것이냐 물어보기가 십수차례 였으니 아직 시범적으로 하는 모양이었다. 여러모로 디엔동이랑은 인연이 없다.
저녁에는 다시..
그래도 기어코 다시 디엔동을 타고다니다 발견한 가게에서 한잔. 이렇게 무거운 술을 마시면서 여행다니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덕분에 여행 말미에 이르러서는 둘다 속이 뒤집어질 지경이었다. 한국인을 처음 본다는 아주머니, 아저씨는 연신 다가와서 이래먹으라 저래마시라 말을 붙히고는 했다.
다음날 가볼만한 곳을 열심히 알아본 결과 위저우는 균자라는 도자기가 유명하고 또 전통적인 약재시장으로서도 유명하다고 한다. 또한 실재 여부가 확인되지 않았다는 게 중론인 하나라 유적지가 있다고 하니.. 약재 시장은 패스하더라도 유적지와 균자는 보러가기로 했다. 아무래도 중원이다. 알려지지 않은 곳에도 볼거리가 있다.
응? 유적지는?
다음날 오전, 택시를 타고 그 전설의 하나라 유적지를 찾아갔다. 시 중심지에서 꽤나 멀리 떨어진 농촌 한 가운데였다. 근데 이게 뭐냐. 그냥 밭이다. 유적지가 어디로 갔냐고 물으니 이미 다 파내고 덮어버렸다고 한다. 아니, 저 남부에서는 성터만 발견되도 성벽을 지어올리던 나라가 무려 신석기 시대 유적을 덮어버리다니?
이후 방문한 박물관에서 본 설명에 의하면 여러 유적지 중에 우리가 온 이 곳이 최대규모였다고 하는 데, 그걸 덮었다고? 허탈한 것을 넘어서서 석연치 않은 의심이 생길 수 밖에 없다. 벌써 광고문구가 칠해진 저 먼지투성이 비석만이 이 곳이 유적지였다는 흔적으로 남아있다.
아까보다 더 시골마을의 골목길
마을로 들어오는 변변한 포장도로조차 없는 곳이라 당연히 택시도 다니지 않는다. 유적은 커녕 밭만 본 허탈감을 이기지 못하고 한바퀴 돌며 마을 구경이나 했다. 대중교통도 잘 없다보니 언뜻 보기에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도 디엔동이나 오토바이를 몰고다녔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마을 주민들이 많이들 거리에 나와 있던데, 그 와중을 걸어다니는 외지인 둘은 그들의 시선을 묵묵히 받아내며 걸어나갔다.
가화만사'흥'
중국 탁구의 저력은 시골의 돌로만든 탁구대에서 시작된다
마을사당
유치원
어쨌든 우리는 마을 구경을 마치고서 콜택시를 불러서 빠져나가야 했다. 유적지를 보지 못한 하나라는 그냥 전설로 남기는 걸로.. 비록 찾아온 하나라 유적지는 없었지만, 아쉽지는 않았다. 그간의 여행은 점으로 이어진 여행이었다. 기차역에서 기차역으로, 관광지에서 관광지로. 고속으로 스쳐지나가버린 그 사이의 무수한 농촌 중 한 군데를 처음으로 밟은 셈이었으니 소득이 없지는 않다.
박물관 규모가 굉장히 크다
다음은 위저우박물관을 보러왔다. 인구가 백만이 넘는다니 그렇게 생각되지 않겠지만, 중국에서 백몇십만이면 꽤나 시골 동네다. 그런데 상당히 큰 규모의 박물관이 들어서있다. 신분증을 내라길래 여권을 냈더니 처음 받아 보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첫번째 한국인이라는 명예(?)는 여기저기서 얻고 다니고 있었다.
균자. 비교적 가까운 시대에 만들어진 작품들이다
박물관에는 앞서 다녀온 유적지에서 출토되었다는 신석기 유물도 있었지만 매우 적었다. 대신 중원지역 답게 역사를 관통하는 유물들이 있었다. 균자도 당연히 크게 전시되어 있었는 데, 균자의 재료가 되는 특정 종류의 흙이 이 지역에서 나왔다고 한다. 이 곳에 관광하러 오는 분은 거의 없겠지만, 혹-시 위저우를 방문한다면 박물관이나 한번 들려보기를 추천한다.
조조의 도시 허창
위저우에서는 직통으로 나가는 길이 없기에 버스를 타고 인근의 허창으로 나와야했다. 그러고보니 여행기간 첫날을 제외하고는 버스를 한번씩 탔다. 버스에서 잠깐씩 자는 게 그렇게 꿀잠이더라. 허창으로 나온 우리는 이제 결단을 내려야했다. 이대로 우한으로 돌아갈 것이냐. 아니면 여기서..
동백, 통바이(桐柏)
그렇다. 아직 갈 곳이 남아있었다. 위저우에 와서 돌아다니는 내내, 마음 한 구석에는 처음 찍은 통바이를 가지 못했다는 부채감이 있었다. 하남성 사람들도 모르는 통바이를 우리는 가야만했던 것이다. 왜냐? 찍었으니까. 물론, 위저우 여행이 의외로 만족스러웠기 때문이기도 하다.
저 두글자가 얼마나 감동적이었는 지 모른다
위저우에서 허창까지 버스 두시간, 허창에서 신양(信阳)까지 기차 세시간, 거기서 다시 갈아타서 신양에서 통바이로 한시간. 중간중간 기다리는 시간을 합쳐 거진 아홉시간 만에 통바이에 당도했다.
중국의 열차는 Gaotie, Dongche, Kuaiche의 세 종류로 구분되는 데, 빠를 쾌자가 앞에 달린 K차가 오히려 가장 느리고, 다른 열차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연착도 심하다. 이번에 통바이까지가면서 K차를 처음으로 타보았는데, 승객들의 인상이나 역(보통 G,D차와는 역이 구분되어있다)과 열차의 외관에서 그 냄새까지. 정말이지 특별한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쥐새끼 하나 없다
산간지역이라 그런지 기차역에서 내리자마자 추웠다. 이틀 전 낙양에서는 40도에 근접하던 온도가 이곳에 오니 10대로 떨어져 있다. 비가 온 탓이기도 했을 것이다. 역시 택시를 타고 숙소를 찾아들어가 짐을 풀고 나오니 저녁 10시가 다 되어간다. 둘다 배고파 미칠 지경인데 아무리 눈씻고 찾아봐도 문 연 가게가 없다.
앞서 위저우가 인구 백수십만인데도 시골이라고 했는데, 여기는 40만이다. 40만도 시골이 아닐 것 같지만, 인구 40만 사는 와이마이(배달음식)도 없는 도시의 저녁 10시 풍경은 재난이나 좀비 영화를 연상케 한다. 면적의 단위가 크기 때문에, 인구가 많아도 시내는 작은 곳이 많다. 그러나 기어코 문 연 식당을 찾아내었고, 또 기어코 그냥 음식만 먹고 나오지는 않았다.
수렴사(水帘寺)
통바이는 중국에서도 그다지 유명하지 않고, 한국에는 더더욱 그렇다. 열심히 검색을 해봤지만 통바이에 온 한국인은 난을 키우는 어떤 중국인을 인터뷰하기 위해 온 경우 밖에 발견할 수 없었다, 아무쪼록 첫 한국인은 아니지만, 한중수교 이후 열번째 안에는 들지 않겟느냐고 서로 농담을 건넸다.
통바이라는 지명은 호북성-하남성 경계에 위치한 동백산에서 따온 것으로, 산에 물이 많은 지 중국에 흐르는 많은 강들의 발원지가 된다고 한다. 삼국지 위연이 이 지역 사람이라고도 하고. 유명한 녹차가 있다고 한다. 뭐 사실 잘 모르겠다.
마지막 날은 비가 꽤 왔다.
위저우에서 그랬듯, 통바이에서도 우리는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여기서 뭘 보러가야 하느냐고 물었는데, 동백산 등산 코스를 많이들 추천해주었다. 그러나 비가 많이 내렸기에 그것은 포기하고 대신 금방 볼 수 있다는 수렴사로 왔다. 그런데 이 작은 절을 왜 보러오라 한 건가 싶을 정도로 볼게 없었다. 근데.
사진으로는 결코 한장에 담을 수 없는 사이즈
절 뒤로 산을 조금 올라가자 거대한 폭포가 나왔다. 생각치도 못한 풍경을 발견하자 그 자리에 서서 와, 하고 탄성만 내지를 뿐이었다. 비가 많이 내린 날이여서 그런지 그 풍경이 더 장엄했다.
이 날 이 곳에 아무도 없던 것은 비가 와서였을 수도 있고, 그 전에 우리처럼 지도에서 찍지 않고서야 통바이까지 놀러오는 사람 자체가 별로 없어서 였을 수도 있다. 그럼 통바이 여행은 어땠느냐고?
사진은 항상 너무 부족하다.
통바이까지의 여행으로 바꿔 말하는 것이 낫겠다. 낙양에서 출발해 위저우를 거쳐 통바이까지, 몸은 (여행 때문 만은 아니지만) 녹초가 되고, 특별한 풍경은 보지 못했을지라도 꽤나, 만족스러웠다.
이동수단이 잇는 점과 선 사이에 놓인 곳들, 지도에서 찍지 않았다면 평생 올 일이 없던 곳들을 지나왔다는 데에 한번 쯤은 의의를 두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마지막 날 수렴동 속에서 본 폭포, 그리고 비온 날 산간에 드리워진 운무가 선사해준 풍경은 이번 즉흥여행의 클라이막스가 되어주기에 충분히 훌륭했다.
다음 포스트는 지난 주에 다녀온 은시에 대해서 작성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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