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중국은 단오절 연휴 기간이다. 글을 쓰는 오늘이 일요일인데 화요일까지 수업이 없다. 한국이 단오절을 자기네 것이라고 여긴다고 생각한 중국 일각에서 과단성 있게 연휴를 선포함으로써 단오절을 진정한 명절로 만들어주었다. 기차표를 못구해 어디로 떠나지는 못했다만 그래도 고맙다.
지난 주에는 3박 4일 일정으로 장사-봉황고성 여행을 다녀왔다. 관련 자료들을 검색해보니 장가계와 함께 패키지 여행으로 많이 들리는 곳이라고 한다. 내 블로그 방문 트래픽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장가계 여행자 분들을 나름 배려한(?) 여행지랄까. 시작해본다.
호남성의 성도, 장사
6700만 여명의 인구를 지닌 호남성의 수도 장사는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의 도시다. 인구 자체도 600만 밖에(?) 안되고, 비슷한 사이즈인 난징만큼 볼 거리가 풍부하지도 못한 것이 사실이다. 장사를 가보겠다고하자 장사가 고향인 친구 하나가 딱 네 곳만 보고 오면 된다고 했는 데, 첫날 오후에 도착해서 요기나 할 겸 돌아다니다보니 벌써 그 중 두 군데를 다 가봤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정도로 볼 게 없다.
태평가. 장사의 시내 중심에 있다
태평가 내부
오후 2시쯤 숙소에 짐을 풀고 요기를 하러 나온 곳이 그 친구가 추천해준 태평가였다. 오래된 거리라는 것을 보니 아마 일찍이 장사 시내의 주요한 거리가 아니었나 싶지만 지금은 외지인들에게 간식거리를 파는 동네로 변해버린 모양이었다. 마침 출출하기도 해서 안성맞춤으로 이곳으로 나왔다. 그리고 장사의 먹거리라면, 아주 유명한 것이 있으니.
줄을 엄청 서있더라
아직 그 냄새가 기억에 선명하다.
그것은 바로 취두부다. 그간 다녀본 중국의 어느 도시에서던, 길거리를 거닐다 때때로 마주치는 이 놈의 냄새 때문에 인상을 찌푸려 보지 않은 적이 없다. 그 원흉이 바로 이곳 장사다. 아직 마주해보지 않은 분들을 위해서 이 놈의 냄새를 설명해드리자면, 푹 삭은 청국장과 홍어 냄새를 반반 씩 섞은 느낌이랄까?
내키지는 않았으나 기왕 장사에 왔으니 먹어보기로 했다. 맛은 어떠냐고. 중국인들이 묘사한 그대로 냄새만큼 맛없지는 않다. 그러나 특별히 맛있지도 않더라. 다 비우기는 했으나 입에 남아버린 그 냄새 때문에라도 다시 사먹지는 않을 것 같다.
화덕에 붙혀서 구워낸 밀가루 덩어리
당장 양치를 못하니 다른 음식을 사다 먹으며 입안을 개워냈다. 이 녀석 역시 중국 길거리에서 흔히 보는 간식 거리인데, 꿀을 바른 건지 달짝지근 한 것이 영 맛이 없었다. 태평가 구경은 이렇게 싱겁게 끝나버렸다.
호남 대학 앞. 장사에서는 어디를 가던 마오쩌둥이다
다음 목적지는 악루산(岳麓山)으로 정하고 발을 옮겼다. 산으로 가는 길에 호남대학교를 마주하고 한장 찍었다. 뒤편의 산림 속에 위치한 악루서원의 후예를 자처하는 대학교로 우한대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악루산 입구
악루서원 전경
악루산에 접어들었을 때는 이미 시간이 많이 늦어 서원에 입장할 수가 없었다. 악루서원은 송태조 연간에 지어져 일찍이 중국 4대 서원 중에 하나에 꼽혔다고 한다. 왕부지, 그리고 특히 증국번이 이 서원 출신이라고 한다.
장사라는 지명 자체는 한국인들에게도 많이 낮설지 않을 것이다. 삼국지에서라면 유비가 형주에 들어선 이래 광속으로 공략한 형주의 남부지역이다. 춘추전국시기에는 호북성 지역과 함께 초나라에 속했다. 이후 오래간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기지 않다가 근현대에 이르러 많은 인물들을 낳은 곳이다. 호남성을 줄임말로 '상'(湘)이라고 하는 데, 태평천국운동을 진압한 증국번의 상군이 바로 여기서 나왔다.
청나라 정부는 당시까지 한인 관료가 군권을 장악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해왔는 데, 증국번이 그 첫번째 예외가 되었다. 태평천국운동은 팔기제를 기반으로한 청나라 군사제도가 완전히 무너져버렸음을 만천하에 드러냈고, 증국번과 그 휘하 한인관료들은 그 빈자리를 급속히 장악했다. 당시 주변인들이 증국번에게 황제에 등극하라고 간언할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청나라 조정은 증국번의 등장과 함께 이미 허수아비 상태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증국번 사후, 어쩌면 증국번보다 유명한 이홍장과 좌종당이 그의 세력을 계승했고, 그 라인은 원세개까지 이어진다.
산 전체가 무덤으로 보일만큼 혁명열사들의 무덤이 많았다
호남성은 중국 근대에 혁명의 열기가 뜨거웠던 지역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한 악루서원에서도 상대적으로 유명하지는 못하지만 중국의 근대화를 위해 투신한 많은 인사들이 배출되었다. 마오쩌둥은 일찍이 20년대부터 호남성 농민운동에 대한 보고서를 쓰면서 이 지역에 혁명 열기가 고조되어 있다고도 말했다. 산 곳곳에는 신해혁명 이전부터 신중국 건국까지 다양한 시대를 거치며 다양한 연유로 희생된 혁명 열사들의 묘가 놓여져 있었다.
묘들도 제각각 급과 사이즈가 다른 것처럼 보인다.
루산사(麓山寺), 악루사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코끼리 상이 인상적이었다
악루산 내에는 루산사와 함께, 운루궁, 신민학회구지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었다. 다만 운루궁과 학회 구지는 가보지 않았는데, 시간이 너무 늦어 입장이 불가능할 것이 확실했고(저녁 5시 반이면 대부분의 관광지가 문을 닫는다) 이날 비가 흩뿌려진 산이 굉장히 습해 도저히 갈 생각이 들지를 않아서이기도 했다.
항일전쟁 당시의 사령부
수도권의 지척에 북한을 두고 있는 우리나라로서는 전쟁 대비 시설을 목도하는 일이 자주 있을 법하지만 내륙 깊숙한 장사나 우한에서 전쟁 대비 시설을 발견하면 이채로운 느낌이다. 항일전쟁 시기 지어진 것인지 후대에 신설한 것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우한대학교에도 방공호가 있다. 장사 역시 항일전쟁시기 일시적이나마 함락 당했고, 그 전에 이미 중국군의 초토화 작전으로 불태워진 아픔이 있는 도시이다.
포자가 (坡子街) 입구
포자가 역시 일전의 그 장사친구가 가보라던 여행지인데, 역시 외지인을 상대로 특산물을 파는 등의 지역이었다. 호남성 특산물들을 먹어보기도 했는 데, 한국인 입맛에 잘 맞는 것 같다. 흔히 사천 요리가 유명하다보니 그 쪽만 맵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호남 요리는 사천보다 더 맵단다. 내가 주로 마시는 흑차도 호남성 안화에서 생산된다.
화궁전
포자가 내부에는 화궁전도 있는 데, 불의 신을 섬기는 작은 사원이라고 한다. 지금은 심각하게 상업화가 되어있어 내부에 그다지 볼 것은 없었다. 장사 역시 중국 4대 화로에 속하는 도시 중에 하나다. 덥기도 하고 맵게도 먹는 도시니 화신을 섬긴다는 게 적절한 느낌이 있다.
두보강루(杜甫江阁)
다음은 강변을 보러 나왔는데, 무슨 누각이 있길래 입장해보니 두보를 기념하기 위해 새로 지은 것이었다. 내부는 두보를 기념하는 시설로 가득 차있었고, 꼭대기 층에서는 중국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이 었었는데, 운치 있더라.
누각 아래에서는 중국 어디를 가나 볼 수 있는 광장무가 진행중
장사를 지나는 저 강의 이름은 상강(湘江)이다
북으로 동정호를 지나 장강과 합류한다
상강의 동안이 상대적으로 발달한 반면 앞서 악루산이 었던 서안은 낙후한 것이 눈으로 보일 정도이다. 숙소로 돌아와 집주인과 가볍게 맥주를 한잔하며 들어보니 저쪽에서는 뱀 따위도 자주 나오고, 그걸 먹는 게 또 장사의 별미라고 하던데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정작 본인들도 이 곳 사람은 아니다.
상강 한가운데 있는 귤자도
상강 한가운데에는 기다란 모양의 섬이 하나 있는데, 귤자도라고 부른다. 귤이 한자였다니. 아무튼 섬 자체도 면적이 작지 않다. 우습게 보고 걷다가 한두시간 훌쩍 간다. 공원이 크게 조성되어 있어서 운동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마오쩌둥이 남긴 글, 내 수준으로는 한글자도 식별이 안된다
호남성하면 빠질 수 없는 인물이 바로 마오쩌둥이다. 마오쩌둥은 장사 남방 근교의 작은 도시 샹탄에서 출생했다. 앞서 말했듯 호남성은 많은 정치인들을 낳은 곳이다. 중국 현대사를 이끈 하나의 축인 류샤오치, 한국전쟁에 개입해 북진통일을 이뤄내지 못하게 만든 펑더화이 역시 호남성 출신이다. 두 사람 모두 마오쩌둥에 비판 당해 실각한 이후 문화대혁명 시기 홍위병에 의해 지나치리만큼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장사에는 곳곳에 마오쩌둥이 있다. 귤자도를 온 것도 바이두 지도에 큼지막 하게 표시된 이 석상을 보기 위해서였다. 아직 머리카락이 온전히 붙어있는 청년 마오쩌둥. 1920년대 저 젊은 이는 이 곳 장사에서 어떤 미래를 보고 있었을까.
봉황의 남방장성
짧은 장사 답사를 마치고서는 바로 봉황고성으로 향했다. 봉황고성은 상서(湘西)토가족-묘족 자치주 내에 위치해있다. 이름 그대로 소수민족이 많이 사는 지역이다. 호남성의 서쪽 끝에 위치해 있는 데, 장사로부터 화이화(怀化)시까지 서쪽으로 기차를 타고오면서 점점 산이 많이지는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상서의 지형은 마치 강원도 마냥 곳곳이 산이다. 한족에 의해 점차 밀려내려온 소수민족들의 자치주가 이런 곳에 형성된 것이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봉황고성은 화이화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들어가야 했다.
봉황에 도착한 첫날, 숙소 주인의 예상치 못한 환대(?)를 받아 구경은 못하고 대신 그 친구들 무리와 먹고 놀았다. 중국에서는 십리만 가도 말이다르고, 백리를 가면 풍속이 다르다(十里不同音,百里不同俗)는 말이 있는데, 그 말 그대로라서 이 친구들이 자기들끼리 뭐라고 하는 지 영 못 알아듣겠다. 봉황구경은 그 어색한 저녁을 보낸 다음날부터 시작했다.
남장성
남방장성은 명나라 만력제 시기부터 지어진 것으로 200km에 약간 못 미치는 규모다. 북방의 만리장성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산간을 타고 오르는 이 장성을 건축한 것 역시 대단한 일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전통적인 중국의 영역 안에 떡하니 들어선 이 장성이 뜬금없어 보일 수 있는 데, 이 장성은 바로 묘족을 막기 위함이었다.
이 날도 비왔다.
달리 말하면 당시까지 이 지역이 완전히 중국의 영역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당시 묘족은 중국 정권에 굴복한 숙묘(삶아졌다, 또는 익었다라는 뜻의 熟)와 독립성을 유지하던 생묘로 나눠어져 있었고, 장성은 그들을 분리해서 통제하려는 일환에서 지어졌다.
장성 자체가 묘족을 동화시키는 데 얼마나 기능을 했을지는 알 수 없지만, 결국 수백수천년 간의 노력(?)이 결실을 거둬 이제 생묘를 자처할 수 있을 만한 집단은 없어보인다. 묘족은 중국 소수민족 중에서도 인구집단이 굉장히 큰편이지만, 그 언어가 계승되고 있지는 못하다. 전날 저녁을 함께보낸 친구들도 한 명의 토가족을 제외하고는 모두 묘족이었는데, 당연하게도 일반적인 중국인과의 차이가 없었다.
굉장히 높다.
다만 봉황고성이 현대에 이르러 관광지로 각광을 받으면서 묘족 문화 역시 지역적 차원에서 재조명을 받고 있는 듯한 모양이다. 봉황 고성 내의 상점들에는 묘족 복장 등을 파는 상점이 많았다. 봉황고성 자체가 이 남방장성의 일환으로 지어진 한족들의 성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아이러니한 전개다. 상서자치주는 한족보다 소수민족 인구가 더 많다고 한다.
중국의 민족 개념을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다. 광활한 지역에 분포하는 십수억명의 한족들이 어떻게 동일 민족 관념을 공유하는 지를 궁금해했던 적이 있다. 남방과 북방, 서방과 동방 사람들은 같은 한족이라 해도 생긴 것, 말하는 것, 먹는 것 등 사는 모습이 모두 다르다. 그들을 단일 정체성 아래에 포섭시키고 지속적으로 묶어놓는 힘은 과연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주요한 것은 아마 역사가 아닐까 생각하지만, 남방장성에서 들여다볼 수 있는 정책적인 식민화도 작용했으리라. 장성의 설치와 함께 그 내부는 급속히 한족에 동화되지 않았을까?
변성(边城), 그리고 봉황고성
봉황
남방장성의 한자락에 위치한 봉황고성 역시 한족 정권에 대항한 묘족들의 서글픈 역사가 새겨진 현장이다. 우선 성 자체가 이곳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려는 일환에서 세워졌으니 말이다. 묘족은 요순시대로부터 기록이 전해져오는 민족으로, 예전에는 한족의 원류가 되는 민족과 함께 중원지방에서 공존하다가 점점 밀려 내려왔다. 묘족이 중심이 되었던 초나라부터 점차 남하해 이곳과 같은 산지에 정착하고, 또 일부는 동남아까지 퍼져나갔다. 이곳만해도 명나라 건국부터 장성 축조까지 200여년 간 30여 차례의 군사적인 토벌이 있었다고하니 묘족이 겪은 고충을 짐작하기도 힘들다. 현재의 중국 강남지방에 거주하다가 점점 밀려내려가며 결국 현재의 베트남에 정착한 월족의 역사와도 비슷하다.
봉황 고성 내부의 거리
장성이 축조된 이후에도 묘족의 반란 내지는 독립운동은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결국 청조 건륭제 시대에 이르러 인근 지역에서 병력 40만 여명을 동원해 봉황의 묘족들을 도륙하고 나서야 결국 이곳에 철저한 지배권을 확립했다고 한다. 아일랜드에 대한 영국의 식민화의 역사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봉황고성 골목
봉황고성이 새삼 관광지로 각광을 받게 된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이 곳이 매우 낙후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고래에 지어진 건물들이 그 양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고, 강변에 지어진 조각루(吊脚樓)의 이채로움이 그 매력을 더하기도 했다.
성벽 왼편의 가옥들은 강 위에 지어진 조각루다
또 한가지 요인은 끈질긴 탄압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버텨낸 묘족문화일 것이다. 한때 노벨문학상 후보로 선정되었던 송중문은 이곳 봉황에서 출생했는데, 이 곳의 묘족문화를 담은 소설 '변성'을 집필해 이 곳을 알리기도 했다.
타강(它江)과 조각루
고성은 말 그대로 정말 아름다웠다. 한두시간이면 다 돌아볼 수 있는 규모이지만, 중국의 다른 어디에서도 이런 분위기를 느껴본 적이 없었다. 날씨가 도와주지 않아도 카메라를 들이대면 바로 그림이 나오는 곳이었다.
저녁, 타강의 한쪽에는 술집 등이 쭈욱 늘어서 있다.
저녁이 되자 배를 타고 타강에 나갔다. 중국에서는 조명을 굉장히 잘쓴다. 배를 타고 다니다보면 강가에 위치한 카페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소리가 들린다. 분위기 하나는 정말 죽이는 동네다.
홍교(虹桥)
홍교를 지나서
가운데 보이는 것이 문인들의 명부를 모아놨다는 만령탑이다
이런 풍경 아래에서 한적하게 배를 타고 내리니 벌써 말랑말랑 해졌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굳이 이 곳에 누군가와 함께 다시 와야겠다는 생각은 딱히 없었다. 아직까지의 내 여행지 중에서 봉황을 최고로 만들어 준 것은 배를 내리고서 찾아간 바로 '변성' 공연이었다.
변성 공연장은 고성 중심가에서 조금 떨어져 있다.
변성 공연장은 고성 중심가에서 조금 떨어진 지역에 있다. 중국에서 택시를 탈때는 아무래도 의사소통이나 비용면에서 편리한 디디추싱을 많이 탔는데, 여기서는 그게 없더라. 대신 오토바이를 택시처럼 잡아 탈수 있다. 무섭기는 하지만 가격도 착하고 속도도 빠르다.
공연장에만 300억이 넘게 투자되었다고
앞서 항저우에서 다시는 중국에서 공연을 보러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평이 너무 좋고 사실 봉황이 좁은 지역이라 저녁에 할 것도 없다보니 찾아가게 되었다. 가격도 인상서호의 반값 정도로 착하다. 날씨가 안 좋은 일요일 저녁이여서인지 공연장이 널널해 다른 관객들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앉을 수 있었다. 인상서호도 이렇게 봤으면 감동이 열배는 되었을텐데.
앞서 언급한 송중문이 쓴 동명 소설 변성을 원작으로 하는 공연이다. 그 소설을 읽지는 못했지만 대략적인 줄거리는 따라갈 수 있었다. 주인공 추이추이의 비극적인 이야기가 진행된다. 사진 속에 보이듯 스케일도 크고 묘족 문화가 어우러져 다채롭다. 공연이 오래되지 않아서 연기자들이 아주 숙달되지는 않아보였지만, 음악이고 연출이고 모두 훌륭했다.
아. 다시보니 또 슬퍼진다
이 공연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나중에 누군가와 함께 다시 봉황을 방문할 일이 있을 것 같다. 봉황을 지나게 된다면 꼭 놓치지 않고 관람하시길 바란다. 공연이 모두 중국어로 진행되기 때문에 그 부분이 난감할 수 있다면 소설을 읽고 와서 관람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언어를 빼놓고 보아도 충분히 훌륭한 관람이다. 공연이 시작된지 얼마 되지 않아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을 뿐, 머지 않아 중국을 대표하는 공연 중 하나가 되지 않을까 싶다.
다음 날은 변성의 저자인 송중문의 묘지를 찾아갔다. 전날 본 공연의 감동이 아직도 남아있었다. 한 명의 작가가 해낼 수 있는 일도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른 편에 빨간 옷을 입은 여자가 신부다
앞서 말했듯 봉황고성이 작아 볼게 없다보니 무료해지려는 데, 숙소 주인이 자기 친구 결혼식 보러가지 않겠냐고 제의를 한다. 이미 첫날 저녁 덕분에 어색하게 몇 시간을 앉아있던 기억이 있어 거절하는데 여기 결혼 문화를 보고 가라고 재차 제의하며 난감하게 만든다. 결국, 갔다.
아직 비어있는 아파트를 통으로 빌려 한켠에서는 요리를 하고, 안쪽에서는 주연이 한창이다. 이렇게 신부 쪽 친구들을 불러 하루를 먹고마시고, 신랑 쪽을 불러 하루를 먹고 마신다고한다. 잠깐 앉아 점심 식사를 같이하는 데, 와 이사람들 술을 장난 아니게 마신다. 특히 신랑한테 한잔 먹이려고 그러는 거 였다. 나보고 백주를 얼마나 마시냐길래 저거 반병 쯤 마신다는 겸손한 표현을 했더니 비웃더라. 그런 단순한 도발에 낚여 치기가 오르려는 순간.
종이컵에 백주를 가득 채우고서는 지네끼리 원샷을 해버린다. 아, 난 저거 한잔이라도 마셨다간 우한 못 간다. 조용히 입을 닫았다. 그 친구들도 위장이 쇳덩어리는 아닌 지 두 세잔 들이키고 나니 오락가락 하는 모양이다. 신랑을 대신해 계속해서 백주를 들이키던, gay라고 써진 티셔츠를 입은 신랑 동생놈이 결국 내 옷에 오렌지 주스를 쏟았고, 덕분에 옷갈아 입는다는 핑계로 그 전쟁터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봉황고성에서 먹은 라미분(辣米粉). 이름대로 참 단순한데 맛있다. 보다시피 두 그릇이나 먹었다
이제 정말 우한으로 돌아갈 시간. 여행기간 내내 비도 오고 찜통 더위였지만 봉황고성의 고즈넉함, 변성의 아름다음, 짧게나마 들여다본 이곳 사람들의 정겨운 삶까지를 떠나는 게 못내 아쉬웠다. 호남성 음식들도 매운 것이 내 입맛에 잘 맞았다. 정말이지 언젠가는 다시 찾아와야겠다는, 뭐라 말할 수 없는 유감을 남기고, 나는 결국 우한을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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