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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2017.2~)/여행기

09. 호북성의 보물, 은시


 학기가 끝나간다는 사실에 다들 조급성이 일었는지, 여행가자는 말이 한창이었다. 점점 기말고사가 닥쳐오고 있으니, 그 주 주말이 바로 학기 중 마지막 여행이 될 것이었다. 몇몇이 모여 어디로갈까 여행지를 물색하다가 비용, 시간면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점수를 얻은 은시가 낙점되었다. 하남성으로부터 돌아온 게 월요일이었으니, 삼일 있다가 목요일에 은시로 출발한 셈이었다. 


 은시(恩施)는 우한과 마찬가지로 호북성에 속해있는데, 호북성 서쪽 끝에 위치한 관계로 거리가 매우 가깝지는 않다. 우한에서는 D차를 타고가는 데, 철도의 문제인지 기차의 속도가 시속 150km 미만에 머물러 4시간 남짓 걸렸다. 


은시는 장가계와 여러모로 공통점이 많은 지역이다. 토가족이 많으며 역시 토가족-묘족 자치구라는 것, 그리고 산악지형이라는 것, 나아가 풍경까지 비슷하다고 들었었기에 사실 장가계를 이미 갔다온 우리 셋에게 썩 내키는 여행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장가계보다 좋았다.



여아성, 뉘얼청(女儿城)


역 앞


 은시자치구의 인구는 4백만, 은시 시의 인구도 80만여명이니 그다지 작은 도시는 아니다. 관광업이 발달한 도시 답게 내리자마자 호객꾼과 호텔이 무수히 많다. 몇몇 호객꾼들은 아주 끈질기게 이십여분간을 따라왔다. 은시의 시내는 역 앞이 아니라 택시를 타고 이십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여러모로 그쪽에 방을 잡는 게 편리할 것이다.


여아성, 목요일 저녁에도 사람이 많다


숙소를 예약하지 않고 갔기에 버스터미널이 있는 시내에 내려 방을 구했다. 여기서 무려 방 2개에 100원인 싸구려 방에 묶었다. 더위, 냄새, 모기 등에 다들 힘들어해 다음 날은 좀더 좋은 방을 구했다만, 나로서는 학기가 끝나고 이어질 긴 여행의 예행연습을 해본 셈이다. 도착한 시간이 늦다보니 방에 짐을 풀고나오자 이미 8시 남짓이다. 저녁을 먹으러 여아성이란 곳으로 갔는데, 관광객을 상대하는 테마파크다.


파인당(巴人党)

호화스러운 식사


 저녁 9시경, 대부분의 식당은 이미 손님을 받지 않더라. 시내에서 굳이 여아성까지 나온 것도 그 이유가 컸다. 다행히 파인당이라는 한 식당이 받아줘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등이 이쁘게 달려있었다. 지방 특색이 있는 요리라는 데, 사실 중국에서 먹어본 요리가 우한은 짜고, 강남은 달고, 호남은 좀 맵다는 것 빼고는 다 비슷비슷해서 차이점은 잘 모르겠다. 맛은 꽤나 좋았다.


 파(巴)라는 지명은 흔히 사천지방을 뜻하는 '촉'자와 함께 붙기에 그 지방을 뜻하는 줄 알았는데, 호북성 서쪽의 이곳도 파라고 불리더라. 기차를 타고 지나온 역 중에 '파동'도 있었다. 현대에야 기차타고 편하게 올 수 있지만, 여기도 산악지대 깊숙히 있어 오지라면 오지다. 토가족이 춘추전국시대 파나라의 후손이라는 학설이 있다고 한다. 



은시대협곡



 택시기사는 은시는 아직 아니라면서 고개를 흔들었지만, 은시 정도면 한국인에게도 제법 잘 알려진 아주 유명한 관광지다. 호북성 끄트머리에 위치한 이 궁벽한 산악도시까지 전중국으로 부터의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그 주인공이 바로 은시대협곡이다. 


장강 뭐시기 하는 간판은 많았는데, 이게 정말 장강인지는 모르겠다.


 아침에 시내 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한시간 반정도를 들어갔다. 부족한 잠이나 보충할 생각이었는데, 버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아주 그림이다. 버스가 흔들리다보니 좋은 사진을 많이 못찍어 아쉽다. 해발 1500미터에 위치한 은시대협곡까지 올라가면서 장대한 산악이 하나둘 고개를 드러내었다. 풍경을 보느라 정신 없이 한 시간 반이 흘러갔다. 버스에서 내리고나니 이대로 돌아가도 만족스럽겠다는 생각이었다. 새벽비를 맞고 드리워진 운무는 보너스.


협곡 아래에서


 사진은 항상 너무 부족하다. 은시대협곡 주변으로도 거대한 절벽과 산맥이 드리워져 있었는데, 개발된 게 이곳이라 은시대협곡만 유명한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풍경이 아주 죽여줬다. 여기서 케이블카를 타고 협곡으로 올라가는 데, 같이 간 친구는 내내 단군할아버지의 위치선정을 애석해했다.


케이블카를 타고올라가면서

십분 조금 넘게 올라간 것 같다


 이윽고 케이블카에서 내리자, 해발 1500미터의 협곡 위의 차가운 공기가 급습한다. 나는 흡연자라 그런지 별차이를 못느꼈지만 같이 간 형은 연신 공기 좋다는 말을 연발했다. 중국인들은 이런데 여행 와서 폐청소를 한다고 표현하더라. 호쾌하게 맥주 한병씩 사들고 등반을 시작했다.


파란 죄수복 티셔츠를 입은 40-50명의 남성 탈옥수 무리와 내내 함께했다


 협곡 아래 절벽지형까지해서 총 5시간 정도 걷는데,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등반하실 정도니 코스의 난이도는 그렇게 높지 않다. 그래도 가마꾼은 많아 20대 남자 세명에게도 호객행위를 하더라. 내가 타면 꽤 힘드실텐데, 요금을 두배로 받으려나? 장가계와 마찬가지로 계단이 잘되어 있다. 중간중간 카스트르 지형의 사이사이를 걸어가게 안배한 코스도 있어 이채로웠다. 


절벽잔도


무한도전에도 나올 정도로 특색이 있는 중국의 잔도. 잔도공 관련 다큐멘터리도 재밌게 본 기억이 있다. 이 절벽 잔도야 관광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지만, 초한지 시대에도 유방이 잔도를 불태우며 파촉에 들었다가 다시 잔도를 지으며 나왔다니 역사적으로 오래된 교통수단이기도 한 것이다. 


사진은 언제나 부족하다


파촉 정도로 지형적으로 고립된 지방이 그것도 너무도 일찍이 한족 문화권에 흡수된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너무도 가까이에 너무도 거대한 집단이 있던 것일까? 어쨋든 정복자들은 잔도까지 만들어 타고 들어와 지배했다. 우리가 익히 잘아는 파촉의 지배자인 유방, 유비만해도 여기서 수천키로 떨어진 곳에서 잔도를 타고 들어온 외지인이다.



저 마을에 기와지붕이 얹혀져 있으면 더 이쁘겠다는 생각은 관광객의 욕심일까?


 유럽이 이질적인 문화집단이 공존할 수 있는 지형적인 다양성이 있던 반면, 중국은 대륙, 그것도 평야 중심의 일변도적인 지형이라 일극중심의 전제체제가 그것도 조숙히 들어섰다는 이론을 본 적이 있었다. 여기서 중국경제사라는 과목을 들으면서 그 '조숙한 봉건성'을 주장한 책에 서평을 썼었는데, 아무래도 중국어가 조잡하다보니 중국인에게 검수를 부탁했다. 



 그는 '예전의 문화적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지형적인 통일성으로 인해 현재는 하나의 정치체제, 문화구조에 동화되었을 수 있다.'라는 문구를 문제삼고는, 교수님이 화를 낼 수 있다며 무자비하게 지워버렸다. 지금도 문화적으로 다양하기 때문이라는 데, 중국은 그 규모에 비해 다양성이 부족한 게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은시대협곡의 꽃이라는 일주향


여기서 사학도로서 듣는 과목은 중국 경제사가 유일한데, 그 과목은 지나치리만큼 마르크스 역사발전론에 충실하다. 조숙한 봉건성 역시 마르크스 이론에서 빗겨나간 중국 역사 발전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나온 이론으로, '경사성'이 있는 발전이라는 표현이 뒤에 함께한다. 중국 역사가 비록 마르크스 이론에 완벽히 합치되지는 못해도 해당되기는 한다는 게 요지로, 우리나라 수능에 해당하는 가오카오에도 나오는 표현이라고 한다. 


왜 역사 얘기하고 있지


 그 책 서평을 썼는데,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도 못하겠고 함부로 비판도 못하겠더라. 마르크스라는 이름은 빼버리고 서구 한두 나라의, 그것도 한두세기 전까지의 경제사를 가지고 귀납적으로 만들어진 이론에 굳이 중국경제사를 비틀어 끼워넣을 필요가 있느냐고 썼다. 그걸 발표해야한다는 건 그 뒤에 알았는데, 막대한 부담감, 그리고 약간의 공포에 질려 랩하듯이 빠르게 읽고 지나가버렸다. 다행히 다들 내용보다는 내 기괴한 발음에 집중해준 모양이었다. 못 알아들었을 수도 있다.



 아무튼 여행으로 돌아와서, 은시대협곡 산행은 굉장히 좋았다. 이번 은시행을 함께한 친구들은 장가계에 갔던 그 멤버인데, 모두가 장가계보다 좋다고 한 목소리였다. 내 감상도 마찬가지이다. 앞서 말했듯 이 블로그로 유입되는 트래픽의 반절이 장가계인데, 중국 자유여행을 계획하는 분이 있다면 장가계 대신 이곳으로 와도 좋겠다.


세계에서 가장 긴 에스컬레이터라길래 오천원 씩이나 주고 타봤는데, 그냥 계단 내려오는 게 좋겠더라


장가계를 위한 변명을 해주자면 당시가 청명절 연휴이기도 해서 사람이 무지 많았다. 그러다보니 풍경을 보며 걸을 여유가 없었을 수도 있다. 출퇴근 시간대 지하철을 연상케한 원가계에서 무려 가마를 타고 지나간 사람이 있었는데, 눈을 감고 잠든 척하는 그에게 '편하냐?', '돼지새끼' 등 욕설이 쏟아졌다. 그 때에 비하면 협곡에서 함께한 푸른색 탈옥수 무리는 오히려 상쾌해 정감까지 가는 것이다.


은시대협곡 남변에는 그냥 지나쳐서는 안되는 절벽이 있다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면서 아래에 드리워진 거대한 폭포를 보고 다들 흥분했었는데, 협곡 아래에 그를 따라 걷는 길이 마련되어 있다. 잔도가 깨끗하게 부설되어있지만 물많은 지역이라 그런지 머리에 물을 맞는 거는 피할 수가 없다.



 여행가서 찍은 사진 중에 여기 올리는 건 개중 가장 잘 나온 거라는 점을 생각하면 매번 안타깝기가 그지없다. 내 사진기술의 조악함과 내 휴대폰 카메라의 한계, 그리고 감히 카메라 따위에게 온전한 감상을 허락치 않는 대자연의 엄격함이 합쳐진 결과아닐까.


절벽 곳곳에 폭포가 많다


 우리는 은시대협곡을 당일로 갔기에 조금 급한 감이 없지 않았다. 하루를 묵으며 여유롭게 천천히 봤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은시 대협곡 위에는 호텔이 몇 군데 있는 데, 효도 여행을 계획하는 분이 있다면 그렇게 알아봐도 좋을 것이다.



본래 우리는 당일 토사성까지 관람하고 난 후 장강삼협이 있다는 이창으로 떠날 계획이여서 걸음을 서둘렀다. 그러나 우리의 의지와는 관계 없이 대협곡에서 은시로 돌아가는 버스가 늦은 출발, 교통체증 그리고 손님에 대한 배려(중국 고속버스는 길가에서 손들면 태워주고, 한명 한명 내려달라는 데에서 내려준다. 아니, 길가에 사람이 있으면 손 안들어도 버스부터 세우고 어디가냐고 묻는다.) 덕분에 예상시간보다 한 시간 반 가량 늦게 은시에 도착했다.


은시에서도 광장무는 한창


 결국 일행은 토사성을 포기할 것이냐를 두고 의논해야 했고, 그 결과 은시에 하루 더 있게 되었다. 숙소를 잡고 나온 게 저녁 7시, 전날보다는 서민적이었으나 여전히 맛은 죽여주는 저녁 식사를 하고 잠들었다. 



토사성(土司城)




토사성 입구


 토사성은 명청대 중국에서 토가족의 족장 내지는 왕을 위해 지어준 성이다. 토사라는 명칭에서부터 토가족 전체에 대한 격하를 느낄 수 있다. 중국의 소수민족은 현존하는 민족 뿐 아니라 이미 사라져버린 수 많은 민족들을 통틀어  너무도 서글픈 역사를 안고 존재해왔다. 하지만서도 그런 역사의 반면에서는, 너무나 해맑은 표정으로 자기는 중국에서 태어난 것이 너무 행복하다고 말한 토가족 친구도 있어 일반화해서 말하기는 어렵겠다. 


토가족들은 확실히 굵은 느낌이 있더라. 토가족 남자는 다 잘 생겼다는 말도 있다


분명한 것은 그 소수민족 중 대다수가 가정 내에서도 중국어로 대화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동북, 신장 등 베이징의 지배하에 편입된 역사가 짧은 지역일 수록 정확한 표준어를 구사한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민족투쟁의 지난한 역사를 거쳐 지금은 한족들과 함께 중국인이라는 상위의 범주 하에 통합되고 있는 것이겠다.


그래도 그림이다


토사성은 천연의 흙벽을 둘러싸고 지어졌지만 실질적 의미에서 성으로서의 역할은 못할 것으로 보였다. 우선 성벽 내부 공간이 너무 비좁고, 심지어 물길이 성벽 안쪽에 있어 방어 거점으로서의 기능은 없어보였고, 성벽이 시멘트로 새로 지어진 것 뿐만 아니라 성내에 숲이 크게 퍼져있었다. 토가족은 원래 흙으로 집을 지어서 붙혀진 이름이라던데, 명청대부터는 이 목조건물의 기와지붕 아래에서 토가족 영토를 둘러보았을 것이다. 그래도 그 고즈넉한 분위기는 이채로웠다.



 중국의 민족분류는 통치권이 강남 일부에 국한되던 난징국민정부 시기 그 체계가 확립되어 정확하지 못하다는 비판을 많이 받는다. 예컨데 현대 만주족은 천만명이 넘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지만, 신해혁명 좌우로 멸만흥한의 기치 아래 만주족에 대한 홀로코스트가 있었어서 그 수치를 그대로 신뢰하기 어렵다. 조상 중에 기인이 있었다는 것만 증빙하면 만주족으로 등록해 손쉽게 소수민족으로서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기에 거짓 등록한 사람이 많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거론한 것은 묘족-토가족 간의 구분에 대한 의문이 생겨서인데, 이들의 지역적인 분포, 풍습, 생활양식이 많은 부분에서 겹치기 때문이다. 물론 묘족은 호북성, 호남성 뿐 아니라 저 멀리 동남아까지 넓게 분포하는 만큼 이런 그 구분이 합리적일 수 있는 여지도 충분히 존재한다.


공연도 한다


 토사성에서의 공연은 삼십분 정도 진행되는 데, 토가족 언어 몇 구절을 가르쳐주기도 한다.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데, 한곡을 빼놓고 모두 중국어 노래였다. 사회자들이 즉석미팅도 진행하더라. 관심이 있다면 잘 꾸미고 가시길.


토사성 성벽 위에서


 토사성 관람을 마친 우리는 이제 그 장강삼협, 정확히는 그 삼협을 막아버리고 놓여진 댐을 보러 이창으로 향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기차표를 사려 줄을 한시간을 서야했고, 일정은 뒤로뒤로 밀려 오늘 거기까지 가지 못할 것이라는 게 명확해진 순간, 더위와 습기에 지친 나머지 우한으로 가자라는 말이 나왔고, 거기에 다 같이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여행은 그렇게 끝나버리게 되었다. 


 그래서 어땠냐고. 그날 우한에 돌아가서는 같이 가지 못한 친구들을 불러다가 은시 정말 좋다고 수십번 연발을 했으니, 좋은 것이다. 그날 정말 오래간만에 먹은 한국음식도 새삼스럽게 너무 좋더라. 이제 돌아갈 날도 머지 않았는데 한국이 슬슬 그리워지려나보다. 은시를 마지막으로 학기 중 여행은 끝났다. 


 다음 포스트는 학기가 끝나고 떠날 긴 여행의 준비 과정에 대해서 작성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