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를 시작하다
블로그를 해야겠다는 결심은 중국에 오기 전부터 했었다. 나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공유해야할 필요성을 체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시작하자니 여간 귀찮은 것이 아니라 주저하다보니 어느덧 시간이 이렇게 흘러버렸다.
중국에 오고, bab2min형에게 초대장을 받아 블로그를 개설하고나서도 첫글을 쓰기까지 긴 시간이 흘러버렸다. 정착을 하는 과정에서 이 곳의 지루한 사무처리로 인해 많은 시간을 뺏겨서 이기도 하지만, 블로그 첫글이 될 우한에 대한 소개를 보다 완결되게 하고자하는 욕심도 있었다.
그러나 차일피일 미뤄지는 시간에 마음이 조급해졌고 무엇보다 완결적인 글을 쓰기 위해서는 중국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이 우한대학교 캠퍼스에 벚꽃이 피기를 기다려야했다. 오늘도 수업이 끝난 뒤 답사를 가려다 디엔동(전동이륜차)이 두 번째로 고장나는 바람에 시간도 날리고 발도 묶어버렸고, 이번 주말은 다른 지역으로 여행을 갈 계획이기 때문에 우한에 대해 완결되게 쓰기는 영 멀어져 버렸다.
답사를 다녀와서 중국의 외교관계에 대한 교양강의를 청강하려던 계획이었지만, 대신에 블로그 첫글을 작성하기로 마음 먹고 써내려간다. 고물 디엔동이 고장나 다시금 돈을 먹는 것에 가슴이 쓰렸지만, 경색된 사드 정국 와중에 외교관계 수업에 갔다가 봉변을 당할 위험성(?)도 없애고, 블로그 첫글도 작성하게 해줬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해야겠다.
시작해본다.
중국에 오다
나는 중국을 좋아했다. 이유랄 것을 굳이 찾아보자면, 어린 시절부터 읽어온 중국 역사에 흥미를 느꼈고, 삼국지에 매료되기도 하였다. '언젠가는 중국에 갈 것이다.' 중국에 가서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도 없이-물론 지금도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은 없다- 어릴적의 나는 저런 꿈을 가지게 되었었다.
중국에 대한 막연한 선호는 주어진 조건과 미묘하게 맞물리며 나를 사학과로, 다시 동양사학 전공으로 자연스럽게 이끌어 나갔다. 전공 공부에 굳이 필요하지 않지만, 중국어를 공부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중국으로의 교환학생을 신청하기에 이르었다. 그리고 주어진 여러 선택지 가운데 한국사람들에게는 비교적 생소한 도시인 우한, 그곳에 있는 '우한대학교'를 선택했다.
우한(武汉)
우한은 호북성의 성도로 장강과 한강이 교차하며 중국 대부분의 철도가 관통하는 내륙의 교통 요충지다. 도시 인구는 1000만을 넘어 서울보다 많다. 중국에서는 이선도시에 속하며, 1인당 GDP는 2015년 기준 17000달러를 상회하고 있으니 중국을 대표하는 내륙 거점도시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
관우가 처음 쌓은 것으로 알려진 형주성. 우한에서는 200여 Km 떨어진 형주(荆州)시에 있다. 현존하는 장성은 청조 순치제 3년(1646)년에 명대의 성벽을 중건한 것으로 둘레가 10km에 이른다.
형주성 남쪽 성곽. 해자에 해당하는 물길이 넓다.
형주성 남문 근처에 있는 관우사당. 명 홍무제 29년(1396)에 지어져 보수를 거쳐 지금에 이른다. 중국명 关帝庙
이곳에 오기 전 우한이 어디냐고 묻는 한국 사람들에게는 삼국지 시대의 형주에 해당하는 지역이라고 줄곧 설명하고는 했다. 실제로 우한 내에 삼국지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강하'구가 존재하기도 한다. 사진을 실은 형주성의 성루 뿐만 아니라, 성 벽 곳곳에 삼국지 관련 시설이 즐비하다. 성벽의 남쪽에 있는 관우기념관에는 무려 58미터 높이의 관우상이 들어서있어 보는 사람을 놀라게 한다.
호북성 박물관. 우한내 우창에 소재해있다.
호북성 박물관에 소장된 와신상담의 주인공 월왕 구천의 검.
우한의 역사적 가치는 그것에 그치지 않는다. 춘추전국시기 초나라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당시 이 지역에 존재했던 수 많은 소국들이 남긴 문화 유산들이 지금도 계속해서 출토되고 있다. 엄청난 규모에 비해 내용물이 부실한 느낌이 없지 않았지만, 호북성 박물관에서 춘추시대부터 지금까지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의 유물들을 관람할 수 있었다.
우창 봉기 성공 이후 설립된 호북성군정부 건물. 앞에 쑨원 동상이 있다
호북성 군정부 건물 맞은 편에 있는 신해혁명 박물관. 규모가 상당히 크다.
근대에 이르러서는 신해혁명의 기폭제가 된 우창 봉기가 일어난 지역이다. 보로 운동의 연장선에서 중국 각지에서 봉기가 일어나고 실패하기를 반복하던 와중에 1911년 10월 10일, 우창에서 거둔 혁명군의 첫번째 성공은 불과 1개월 만에 중국 전토로 확산되며 청조의 멸망을 불러왔다. 10월 10일은 쌍십절로 불리며, 중화민국의 건국일이기도 하다.
우한의 명소: 황학루, 한지에(汉街),광구, 호부상
멀리서 바라본 황학루
황학루 전경, 총 5층 누각이다
황학루에서 내려다본 우창. 멀리 희미하게 장강이 보인다. 황학루를 지은 선조들은 미세먼지가 이렇게까지 풍경을 가릴 것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한의 대표적인 명물은 누가 뭐라해도 황학루일 것이다. 삼국시대 손권이 군사적 목적으로 성을 쌓은 것을 시작으로, 1800여년의 세월을 거치며 여러차례 파괴되고 재건되었다. 현대에 남아있는 것은 우한시정부가 중건한 건물로, 내부에 엘레베이터가 설치되어 있는 등 역사적인 색채를 많이 잃었지만, 누각의 규모와 아름다움은 보는 이를 놀라게 한다.
황학루 남변에 있는 최호시제벽
마오쩌둥이 남긴 시
황학루는 강남 3대 명루 중 하나로 많은 유명인사들이 이 곳에 들려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대표적으로 악비, 최호, 이백, 장거정, 그리고 마오쩌둥까지 이곳에 들려 천하절경에 대한 시를 남겼다. 현대화를 거치면서 누각 아래의 풍경이 어지럽혀지고 미세먼지로 인해 시야가 많이 좁아졌다는 점이 많이 아쉬웠다. 날씨가 좋은 날에 찾아가면 좋겠지만 도저히 발디딜 틈이 없을 것으로 보이고, 적지 않은 입장료(80위안, 학생으로서의 인정을 쟁취해내면 40위안이다)로 인해 재방문을 할 기회는 없을 것 같다.
광구光谷
한지에汉街
호부상户部巷
우한의 명소로 추천받은 광구, 한지에는 한국의 명동 같은 지역이었다. 광구는 유럽풍의 건물들을 조성한 거대한 상권으로 독일거리, 이탈리아 거리 등 각각의 컨셉을 잡고 지어 놀이동산에 온 기분이 들었다. 한지에 역시 유럽풍의 건물들이 일렬로 이어져 있는데, 2Km에 달하는 거리가 모두 한사람의 것이라는 풍문을 들었다. 그러나 으리으리한 규모와는 달리 광구, 한지에는 그저 길거리를 걸으며 쇼핑을 즐기는 것이 전부다. 우리나라와 달리 중국의 유흥문화는 매우 발달하지 않은 편으로 보이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과장을 보태자면 상권의 3분의 1이 술집과 유흥시설로 이루어져 있는 반면 이곳의 경우 술집과 유흥시설을 찾아보기 힘들다.
호부상의 경우 우한에 온 외지인들이 특히 많이 보였다. 길거리의 가게들에서 간식거리(小吃)를 파는 지역이었는데, 특별히 맛있다는 느낌은 없었다. 대신 코를 찌르는 취두부 냄새와 신기한 꼬치요리(중국인들도 안먹는다)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우한대학교
우한대학교 구 기숙사건물
우한대학교는 현재 바이두 대학순위 기준, 북경대, 칭화대, 복단대에 이어 4위에 랭크된 중국 유수의 명문대학이다. 청조 말 1893년 세워진 자강학당을 모태로하며, 주변 여러학교를 흡수하는 과정을 통해 지금의 규모에 이르었다. 과장을 보태 우창 지역의 1/3이 우한대학교라고 표현할 정도로 캠퍼스가 크다. 무려 344만 평방미터로 국내 최고인 서울대의 140만 평방미터를 가뿐히 상회하는 크기다. 도착 후 며칠간 학교 이곳저곳을 걸으며 구경하다가 종아리에 탈이날 정도였다. 내가 거주하는 유학생기숙사로부터 수업을 듣는 정보학부(信息学部)까지 직선거리가 2km가 넘으니 디엔동이 없이는 쉬는 시간 내에 수업을 들으러 이동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교정의 북-동쪽을 동호가 둘러싸고 있다. 날씨가 좋은 주말이면 교정뿐만 아니라 동호쪽 역시 발디딜틈이 없다.
캠퍼스가 아름다운 것으로도 유명한데, 특히 벚꽃이 피었을 때가 유명하다고 한다. 학교내에도 벛꽃길이라고 명명된 길이 따로 있을 정도인데, 길의 좌우로 나란히 서있는 거대한 벚꽃나무들을 보고나니 과연 벚꽃이 피는 날이 기다려졌다. 벚꽃이 피는 시기면 학교 방문객들에게 입장권을 팔기까지 한다고 한다. 현재(3.7일) 몇몇 나무가 개화하기 시작하였으니 다음 주 즈음에 절정을 맞지 않을까 싶다. 학교는 우한의 동호에 변해있으며, 교정 내에 락가(珞珈,LuoJia, 이 블로그의 이름이다)산이 있는데, 한국인이 보았을 때는 산이라 부르기 민망한 높이지만 산이 거의 없는 후베이성의 지역적 특성 때문인지 우창에는 락가산의 글자를 딴 지명이 많은 편이다.
교정은 울타리로 엄격히 둘러싸여있지만, 하나의 마을을 형성한 형태이다. 학생들의 기숙사뿐만 아니라(중국에서는 대부분의 학생이 기숙사에 거주한다.) 일반 주민들의 거주시설, 초등학교, 유치원까지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구비된 형태다. 대략 6만명의 학생들과 그들의 일상생활을 뒷받침하는 사람들까지, 교정 바깥의 인구밀도에 미칠 수는 없지만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다.
북경과 상해의 상대적으로 유명한 학교들 대신 내가 우한대학교를 선택한 이유는 첫째로 교통이 편리하고, 둘째로는 한국인들이 적다고 들어서였다. 기대만큼은 아니지만 실제로 철도를 통해 다니기 편리하고 (다만 시속 200키로의 고속철도 역시 중국 대륙을 누비기에는 너무 느리다) 학교 밖으로 나가면 한국인들이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기는 하다. (그러나 우한대학교 유학생 기숙사 정원의 절반은 한국인이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교환학생을 오는 목적이 첫째로 중국 각지를 여행하고, 둘째로 중국어 실력을 향상하기 위한 것이었기에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을 거라 기대되는 우한을 선택한 것이다. 기대대로 잘 될 수 있을지는 아직 불확실하지만, 아직 남은 5개월 여간의 중국 생활은 이제 이 곳 우한대학교를 중심으로 펼쳐질 것이다.
중국생활에 대하여
생활에 대한 측면을 말하자면, 대체적으로 만족하고 있다. 도착한 첫날, 착륙을 준비하라는 기장의 말에 '아직 구름속인데 왜 이렇게 서두르냐'며 창 밖을 내다보았다가 지면에 거의 다다랐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먹을 정도로 공기가 안좋았다. 그날이 특히 심하긴 했지만 내리자마자 '실화인가'하는 의문이 들만큼 시야는 뿌옇고, 기침을 연발할 정도였다. 함께 간 친구와 공항 앞에 내려서 "산이 없는 걸까 아니면 안보이는 걸까"하는 농담을 건네고는 했었다.
유학생기숙사의 방. 구미권 학생들의 입에서 Hell, Prison 같은 단어가 오갔다
매우 좁은 기숙사방에 처음 들어갔을 때, 졸졸 나오는 물 밑에서 힘겹게 샤워를 했을때, 난방이 없는 이 곳에서 추위에 떨면서 잠을 잤을 때만해도 이 곳에 온 것이 과연 잘한 선택인가 싶었다. 기숙사 밖의 화장실을 처음 갔을 때 먹은 충격도 적지 않았다. 한국인이라서 그런지 도저히 방안에서 신발을 신고 생활하기가 힘들어, 더러운 바닦을 박박 닦았는데, 그 과정에서 발견하게 된 수 많은 바퀴벌레 시체들이 나를 정신적으로 힘들게 만들었다. 일대일로 프로젝트의 영향인지 기숙사에 아프리카인의 비율이 높은데, 밤이면 틀어대는 클럽음악과 지치지 않는 저들의 열정이 나를 잠못들게 하기도 했다. 하루 이틀은 기본적으로 걸리는 사무처리 역시 나를 지치게 했다. 한국에서 힘들게 중국어를 공부해왔지만 막상 중국인 앞에서는 음식조차 제대로 주문하기 힘들었다.
도착 이튿날의 점심식사
교내의 훠궈 식당
그러나 그런 우울함은 먹는 즐거움과 보는 즐거움으로 금방 해소되었다. 제대로된 식당에가서 먹는 식사 뿐만 아니라 학생식당에서 아무렇게나 시킨 1000-2000원 짜리 식사도 매우 만족스러웠다. 과연 중국의 요리 실력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루한 행정처리를 기다리면서 비록 아직 제일 멀리나간 것은 형주성밖에 없지만, 이곳저곳으로 나돌며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아직 중국 생활에 완전히 적응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점차 이 곳이 좋아지고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한중관계에 대하여
최근 사드문제로 인해 한중관계가 많이 경색되었다. 경제보복조치 뿐만 아니라, 상해 등지에서 한국인이 폭행당했다는 뉴스까지 들려오는 등 많은 사람들이 불안해하고 있다. 나로서는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밖에 나갔을 때 한국인으로 보이는 것을 조금 경계하지 않을 수는 없다. 물론 그래봤자 형주역에서 안내원에게 길을 물으려하자 바로 "안녕하세요"하고 인사해주실 정도로 내가 한국인인 것은 다 안다. 한국인이 중국어를 할때 특유의 어감이 있다고 한다.
사드 배치의 합리성 여부에 대한 논쟁을 떠나서, 일련의 사태에 대해 내가 느끼는 감정은 안타까움이다. 고작 2주 밖에 되지 않은 중국생활 동안 내가 느낀 감상을 말하자면, 중국인들은 정말 한국을 좋아해주고 있다. 거리에 한국 가요가 나오는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한국어를 공부하고 한국에 대해서 알려고 하는 중국인들이 많다.
광구의 한 상가. 간판들을 자세히보면 한글로 '일본식 야끼니꾸'라고 적혀있다.
한국에 대한 중국인들의 감정은 분명히 호의적이고, 그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자산이 아닐까 싶다. 우리나라가 사드 배치를 강행할 때 치뤄야할 댓가에는 중국 정부의 직접적인 조치뿐만 아니라 한국을 좋아하던 중국인들이 느끼는 배신감까지 산정되어야 하지 않을까.
왕가가 선생님의 기초한국어 수업
우한대학교에서 유일한 한국어 강의를 청강하며 그 안타까움이 배가되었다. 저녁 6시 반에 시작하는 수업임에도 불구하고 정원 200명이 꽉찼을 뿐만 아니라, 그마저 못한 청강생들이 몰렸다. 복도의 계단에 앉아서 또는 뒤에 서서 웃는 표정으로 한글을 따라 읽는 우따(우한대학교를 줄여 우따라 부른다) 학생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들이 한국을 정말 좋아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체감할 수 있었다. 한 학기에 2~30학점씩을 수강하는 이 바쁜 학생들이 한국어 교양 강의를 수강한다는 것은 어지간한 의지 없이는 힘든 일이다.
사드 문제는 최소한 당분간은 양국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방향으로 해결될 길이 요원하고, 최근 우리나라 정부와 미국은 재론의 여지를 남기지 않기 위해 조속히 강행하고 있고 이대로라면 한중관계가 악화될 것은 분명해보인다. 사드 배치에 대한 찬반을 떠나서, 현장에서 이 열기를 느끼고나니 숙연해질 수 밖에 없었다. '사드 때문에 이 강의 없어질까 걱정안해도 된다'는 한국어 선생님의 농담에 마음 편히 웃을 수가 없었다.
'중국(2017.2~) > 여행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05. 근대의 중심 난징, 운하의 도시 양저우 (1) | 2017.04.26 |
---|---|
#01.고물디엔동 (12) | 2017.04.08 |
04. 함께 떠난 장가계 (1) | 2017.04.08 |
03. 중국의 미래, 상하이 (4) | 2017.04.05 |
02. 역사 속의 우한대학교 (1) | 2017.03.21 |